
공정거래위원회가 불공정행위 혐의를 포착하고도 제재 확정이 늦어지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엄격해진 법원 판결, 기업의 적극적 대응, 패소에 대한 부담감 심화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공정위 판단이 ‘신중한’ 차원을 넘어 ‘소극적’인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13일 공정위와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공정위가 불공정행위를 확인해 심사보고서를 올린 주요 사안이 전원회의·소회의 심사 단계에 막혀 있다. 형사사건과 비교하면 검찰이 공소장을 제출했는데 법원 판결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셈이다.
지난해 11월 공정위는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가 납품업체를 상대로 한 불공정행위를 적발, 제재 절차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작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제재 여부를 확정할 계획이었지만 3월이 된 지금까지 결론을 못 내고 있다.
휴대폰 다단계판매가 가격 한도(160만원)를 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건도 결정이 늦어지고 있다. 서울YMCA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8일 공정위가 소회의를 열어 심사했지만 공정위원 간 이견으로 합의를 유보했고 지난달에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공정위원 간 의견이 두 차례나 엇갈리는 것은 드문 사례라는 게 공정위 내부 평가다.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관심을 모았던 퀄컴, 오라클 관련 사안도 전원회의 단계에 막혀있다. 공정위가 오라클 끼워팔기 혐의를 제재한다고 발표한지 1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 결론을 못 냈다. 퀄컴의 특허권 남용 혐의 건은 공정위가 조사에 착수한지 1년이 넘었지만 전원회의조차 열리지 않았다.
공정위가 제재 착수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사안은 그만큼 혐의 입증에 자신이 있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확정이 미뤄지는 것은 최근 환경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공정위 직원들 평가다.
공정위의 ‘1심’을 고등법원, 대법원이 뒤집는 사례가 최근 두드러지며 전원회의·소회의 심사가 신중해졌다는 분석이다. 위법 여부는 맞게 판단했지만 과징금 재산정이 필요하다는 ‘일부 패소’ 판결마저 공정위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패소에 대한 부담으로 전원회의 판단 뿐 아니라 심사보고서 작성시에도 ‘무리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있다”며 “법원 판결이 과거보다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분석도 나온다”고 말했다.

기업 대응이 적극적으로 변한 것도 또 다른 원인이다. 자체 법무 역량을 높이거나, 공정위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대형로펌을 고용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전원회의에서 공정위와 불공정 혐의 기업간 공방이 오가는 모습은 과거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는 게 공정위 직원들 전언이다.
공정위 판단이 신중해져 기업 활동이 과도하게 위축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소극적 활동으로 불공정 행위를 제대로 차단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공정위 내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많다.
다른 공정위 관계자는 “공정위의 활발한 활동은 직접적 시정 뿐 아니라 기업에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분위기를 확산하는 역할도 한다”며 “공정위에 위축된 분위기가 계속되는 것은 경제활동 전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