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업계가 효과가 불분명한 규제로 인해 혼선을 겪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간 상생이라는 취지로 MRO 가이드라인을 도입했지만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모두에 실익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MRO 가이드라인이 시행되는 동안 MRO 업계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성장 정체를 겪었다. 국내 MRO 업계가 흔들리는 동안 외국계 업계가 국내 시장에 진출, 사업 확대를 노리고 있다.
제도 도입 효과가 모호한 데도 동반성장위원회는 가이드라인에서 `상생협약`으로 이름만 바꾼 새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 서브원 등 MRO 대기업은 기존 가이드라인의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은 상생협약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MRO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상생협약에 동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논의에 수요자인 기업들은 아예 배제돼 있다.
업체 간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2014년 11월 MRO 가이드라인 시효가 만료된 후 1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도 후속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동반위는 오는 4월까지 상생협약을 끌어내겠다고 밝혔다. 업계는 이번에 마련할 상생협약은 MRO 업계의 진정한 상생을 위한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효과 모호한 MRO 가이드라인
동반위는 지난 2011년 11월 MRO 대기업 신규 영업 범위를 매출 3000억원 이상 기업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MRO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3년 시한의 한시 제도다.
가이드라인의 취지는 분명했다. 대기업 MRO 업체가 시장을 독과점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매출 3000억원 미만인 중소·중견기업은 중소기업 MRO만 영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장을 나눴다.
하지만 가이드라인 시행 효과는 당초 취지와 다르게 나타났다. 우선 대기업 MRO 업체의 매출은 늘지 않았다. 그렇다고 중소 MRO 업체가 성장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대기업 MRO에 제품을 공급하는 중소·중견 협력사 매출이 정체를 겪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수요자인 매출 3000억원 미만 중소·중견기업은 MRO 업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제한되는 문제도 생겼다.
해외 MRO 산업은 꾸준히 성장하는데 반해 국내 MRO 산업이 침체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그레인저, 독일 뷔르트, 일본 미스미 등 5개 외국계 MRO 업체가 국내에 진출한 것도 가이드라인 시행 기간이었다.
가이드라인은 2014년 11월 시한이 만료됐다. 동반위는 MRO 가이드라인 부작용의 개선안을 마련, 상생협약으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후 1년 이상 논의를 계속해 왔지만 업계의 합의는 끌어내지 못했다.
◇가이드라인 부작용부터 해소해야
동반위가 마련한 MRO 상생협약 내용은 `중소기업법상 대기업은 매출 3000억원 이상 기업만 영업할 수 있고, 매출 3000억원 미만 중소·중견기업은 중소 MRO 유통상을 통해서만 소모성 자재를 납품 받는다`는 것이다. 핵심은 가이드라인과 달라지지 않았다.
MRO 대기업 가운데 행복나래(SK), 엔투비(포스코), KT커머스(KT)는 동반위 상생협약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협약 대상 대기업인 서브원, 아이마켓코리아, KeP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기존 가이드라인의 부작용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MRO 대기업은 가이드라인 부작용으로 국내 MRO 산업 침체를 첫손에 꼽는다. 세계적으로 MRO 산업이 연간 20% 가까이 성장하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가이드라인 시행 후 침체기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국내 MRO 대기업은 2011년 13개사에서 현재는 6개로 줄었다. 사업 매각 또는 철수 등으로 대기업 수가 절반 이하가 됐다. MRO 대기업 국내시장 매출도 지난 2011년 5조원을 넘던 것이 2013년에는 4조8450억원으로 감소했다. MRO 대기업 매출 감소는 MRO 대기업에 제품을 공급하던 수많은 중소 제조기업의 매출 동반 하락으로 연결됐다.
외국계 MRO 기업의 국내시장 진출도 본격화됐다. 2011년 3개이던 외국계 MRO는 2014년 5개로 늘었다.
MRO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동반위가 주관하는 상생협의체에 적극 참여했고 상생안을 도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면서 “기존 가이드라인의 문제점 개선은 없이 형식만 바뀐 부분에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지 상생방안 마련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MRO 가이드라인의 문제점인 기업 소비자 선택권 침해, 외국계 MRO 대기업 국내시장 대규모 진출, 국내 MRO 대기업 간 형평성 문제 등 부작용 해소 방안이 반영되지 않았다”면서 “실질적 상생협력안을 도출하기 위한 협의는 계속하겠다”고 덧붙였다.
◇상생협약으로 새 틀 만들어야
동반위가 목표로 제시한 4월까지 상생협약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절충안이 필요하다. 중소·중견 MRO 업체 보호라는 도입 취지를 살리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모두 만족하는 안이 필요하다.
매출 3000억원이라는 규제를 완화하거나 보완책으로 예외 조항을 마련하는 것 등이 대안으로 꼽힌다. 논란이 되는 중소·중견 기업의 구매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항 마련도 관심사다.
MRO 가이드라인 대상에는 빠져 있지만 상생협약 대상이 되는 아이마켓코리아나 KeP 등 참여 여부도 관심사다. 아이마켓코리아는 상생협약 취지에 동의하지만 합리적 상생 협약이 마련된다면 참여하겠다는 입장이다.
상생이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논의 테이블을 확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동반위는 상생협약에 참여하지 않은 MRO 대기업과 개별 논의를 진행한다. 업계는 상생이라는 취지를 살리고 업계가 만족하는 합의안을 도출하려면 이해관계자가 함께 모여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MRO 대기업 관계자는 “MRO 대기업, MRO에 납품하는 중소 제조기업은 물론 수요자인 중소·중견기업의 의견까지 반영해야 제대로 된 상생협약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건호 전자산업 전문기자 wingh1@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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