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가 지난 2003년 창립 이래 가장 혁신 없는 전기자동차 `모델3`를 내년 말 세계에 내놓는다. 하이엔드·고가 전략에서 대중화로 바꿔 타면서 기술 리스크를 최소화했다. 대중시장 공략에 팔을 걷어붙인 테슬라의 행보가 국내외 전기차산업 전반을 위협하고 있다. 글로벌 전기차 전문가는 모델3의 전 세계 사전 계약자 수가 최종 5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앞으로 2년 동안 전기차 잠재 고객이 테슬라 모델3라는 블랙홀에 다 빨려 들어가는 셈이다. 이제 막 전기차 생태계가 움트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시장 기폭제는 되겠지만 산업 측면에서는 잃을 게 더 많다는 우려가 나온다.
◇모델3 전기차 대중화 신호탄…한국 전기차 산업은 비상
모델3가 공개된 지 사흘 만에 전 세계에서 30만명 가까이 계약했다. 지금까지 세계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전기차 닛산 리프의 5년간 판매량(약 20만대)보다 많은 물량을 사나흘 만에 확보한 셈이다.
가격 합리화 전환과 긴 주행거리 성능으로 대중 소비시장을 노리겠다는 테슬라의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테슬라가 한국에도 모델3를 판매하겠다고 밝히자 수백명의 사전 예약자가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 전기차 시장에 파장을 일으켰다. 모델3는 테슬라 최초의 보급형 전기차다. 기본 가격은 3만5000달러(약 4045만원)이며, 배터리 용량 추가 등 옵션을 포함하면 4만2000달러(4854만원) 수준이다. 이미 출시된 `모델S`나 `모델X` 가격이 7만~8만달러인 점을 고려하면 절반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기차 시장 90%를 차지하는 현대·기아차, 르노삼성의 전기차 가격과 비슷하다. 하지만 주행 성능은 월등하다. 모델3는 1회 충전으로 215마일(약 346㎞)을 달릴 수 있어서 우리나라 전기차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다. 올 하반기에 출시되는 현대차 `아이오닉 일렉트릭` 1회 주행거리는 160~180㎞에 불과하다. 가격 역시 4000만원 초반으로 모델3와 비슷하다. 기아차 `쏘울EV`, 르노삼성 `SM3 Z.E.`도 가격과 주행 성능 모든 면에서 밀린다.
김종우 KAIST 교수는 “모델3의 한국 판매가 알려지면서 우리나라 전기차 민간 보급 공모 참여율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면서 “우리나라 전기차 시장 대중화에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되겠지만 당장 국산 전기차 선호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기차 플랫폼 기술 없는 한국
모델3 사전예약자 대다수는 테슬라의 혁신 기술과 함께 전기차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힌 주행거리를 극복한 점에 끌렸다. 모델3는 세계에서 가장 안정화된 리튬이온 소형전지(규격 18650) 5000개 이상을 장착해 배터리 용량만 44㎾h, 66㎾h 두 가지 옵션을 내놓을 예정이다. 모델3 차체는 한국 전기차와 비슷한 크기지만 배터리를 두 배 이상 장착할 수 있다. 여기에 실내 기어박스 공간을 없앴고, 차량 앞쪽 보닛을 트렁크 용도로 활용하도록 파격을 준 디자인도 갖췄다. 지금까지 국산 전기차에선 볼 수 없는 특장점이다. 현대·기아차, 르노삼성 등과 달리 테슬라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기술을 썼기 때문이다. 같은 가격이라면 테슬라 모델3를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모델3는 배터리를 바닥에 까는 `플로어` 방식을 적용했다. 이 때문에 배터리 양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은 물론 보닛 엔진룸과 기어 박스를 없앨 수 있었다. 여기에 차량 무게 중심과 무게 밸런스, 차대 강성을 최적화시키면서 주행 성능을 높였다.
반면에 현대차 아이오닉EV를 포함해 모든 국산 전기차는 개조형 전기차로, 내연기관 차량과 같이 엔진룸과 기어박스는 물론 배터리를 뒷좌석 하단에 장착함으로써 오히려 실내 공간이 줄었다. 이 때문에 실내 디자인뿐만 아니라 주행 및 추돌 안전성에서 테슬라 전기차에 밀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도 전기차 전용 플랫폼 등 기술 개발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기차 분야 전문가인 박철완 씨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으로 차가 만들어지면 배터리 배치, 충전구 등 위치를 규격화·표준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편리성과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서 “우리나라 시장뿐만 아니라 글로벌 전기차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선 우리 업체도 전기차 전용 플랫폼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배터리업체 위기이자 기회
테슬라의 기습 및 성공적 모델3 예약 이벤트는 앞으로 2, 3년 동안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판도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차 이차전지 시장에서 LG화학, 삼성SDI가 파나소닉 등 일본 배터리 업체보다 많은 공급사를 확보했지만 글로벌 중대형 전지 시장 점유율은 20~30%대에 머물고 있다.
테슬라 같은 파급력 있는 전기차 모델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델3 예약자 수가 50만명까지 이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앞으로 2년 동안 전기차뿐만 아니라 배터리 잠재 고객까지 모두 집어삼킬 태세다. 모델3가 50만대 판매되면 일본은 25억개 이상 파나소닉 원통형 배터리를 공급하게 된다. 한국산 배터리의 전 세계 점유율은 줄어 들 수밖에 없다.
테슬라는 중국 등 일부 업체를 제외하고 전기차용 배터리로 소형 원통형 이차전지(규격 18650) 수천개를 병렬로 연결, 전기차 동력으로 쓴다. 중대형 리튬이온 폴리머 배터리를 사용하는 대다수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다른 방식이다. 테슬라는 이미 원통형 배터리의 장점을 확인시켰다. 원통형 배터리는 2000년 초반부터 세계에서 가장 흔한 배터리가 됐으며, 가격뿐만 아니라 안정성과 수급 문제도 전혀 없다. 안전성과 수명 등 물리적 시장 검증이 필요한 중대형 배터리와는 상황이 다르다.
업계 관계자는 “모델3를 선택한 사람은 대부분 배터리 전기차에 관심이 있던 사람으로, 다른 전기차가 선택받을 기회가 확 줄어들 것”이라면서 “한국의 전기차 배터리와 전기차 산업 경쟁력을 위해선 정부가 나서서 연구개발(R&D) 등 더욱 적극적인 육성책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준 전기차/배터리 전문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