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드라마로 방영된 `시크릿가든`에서 인기 절정의 남녀 주인공 두 사람은 몸에서 혼을 교환한다는 판타지를 설정해 재미를 더했고,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에서 관심을 끈 것은 몸을 두고 혼이 교차하는 바람에 본인이 누구인지는 오로지 휴대폰을 통해 알 수 있도록 한 사실이었다. 즉 휴대폰이 자신의 유일한 대외 정체성(ID)이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대개 이름을 서명하거나 도장으로 자신의 신분을 나타냈지만 최근에는 통신망 상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신분을 대신한다.
대표적으로 공인인증서가 금융거래 등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대신하며 귀중한 재산과 사회 관계를 보호·유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정부와 통신사는 공정 경쟁 유도라는 명분으로 마치 자동차 번호 앞에 거주 지역 표시를 뺌으로써 차량의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을 없앤 것을 흉내 낸 것처럼 신규 개설하는 휴대폰은 물론 기존의 번호도 첫 번호를 무조건 `010`으로 바꾸도록 했다.
하지만 휴대폰 첫 번호를 통일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전자 공간의 신분을 억지로 바꾸게 해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손해를 끼쳤다. 전화번호를 바꾸면 번호를 기록하고 있는 수많은 개인 전화번호부와 곳곳에 기록된 개인 정보를 누군가 수정해야 한다. 그 노력과 비용을 통신사가 부담했던가. 개인적으로 전자 공간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하기 위해 단말기가 두 대라는 불편을 감수하며 21년 동안 사용해 온 휴대폰 번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제 또 하나의 전자 공간 정체성 문제가 불거졌다. 최근에 내가 가입한 통신사로부터 23년 동안 사용해 온 전자메일 주소를 없애겠다는 통보를 일방으로 받았다. 전자메일 주소 삭제는 통신사에 등록된 수많은 전자 공간의 존재를 통신사가 일방으로 깡그리 지워 버리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처사다.
이것은 단지 전자메일 주소 하나를 사용하지 못해 다른 메일 주소로 바꿔 사용하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전자 공간상의 한 존재를 제거하는 중요한 결정이다. 만약 이메일 주소가 개인 신분을 대신하는 것이라면 수많은 조직에 등록된 개인정보가 수정돼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ID를 메일 주소로만 하는 경우 전자 공간에서 존재가 사라진 과거의 ID를 지우고 새로운 ID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이 경우 과거 ID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때로는 추가 가입조차 불가능하거나 신규로 다시 가입해야 하는 등 크고 작은 손해를 보게 된다.
이런 문제를 전자 메일을 제공하는 해당 업체가 깊이 생각해 보았는지 의심이 든다.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다면 메일 발송 및 저장 기능은 포기하더라도 수신된 메일을 다른 메일 주소로 전달(Forwarding)하는 기능을 기존의 사용자가 소멸될 때까지 유지하는 책임감은 있어야 한다. 이메일에 의한 통신을 소비자 동의 없이 통신사 일방으로 제거하는 것 또한 통신 자유마저 침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고일두 서울과학기술대 건축학부 교수(gid@seoul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