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얘기가 벌써 아득하게 옛날 일로 들린다. 그래서 언제였는지 찾아보니까 올해 3월 9~15일 알파고와 이세돌이 바둑을 두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2개월 전 얘기다. 그런데도 왜 그리 오래 전 일로 느껴질까.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직업을 빼앗아 갈 거고, 조금 지나면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될 거라고들 하지 않았는가. AI에 대해 수많은 논쟁과 대담과 분석이 오가는 동안 정부에서도 집중적인 투자를 해서 2, 3년 안에 알파고와 같은 AI 컴퓨터를 한국에서도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또다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 불이 붙었다. 지난 1월 다보스에 다녀온 사람들이 미국의 리쇼어링,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일본의 로봇 신전략, 중국의 제조2025를 들먹이면서 이제는 인류 역사상 새로운 산업혁명이 시작됐다고 외치고 있다. 한국의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고 있고, 덕분에 경제성장률이 밑바닥을 헤매는 가운데 드디어 어두운 터널 끝을 본 것처럼 너도나도 제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대통령까지 나서서 과학기술 중흥을 통한 제4차 산업혁명이 우리 주변에서 이미 시작됐다고 했다.
알파고, 제4차 산업혁명 이전에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항상 기대감보다 공포감을 앞세우면서 몰려 왔다.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빌리티, 고객관계관리(CRM), 전사자원관리(ERP), 공급망관리(SCM), 지식경영(KM) 등이 줄기차게 연속적으로 나타나서 새로운 변화에 동참하지 않으면 회사의 생존이 위태롭다고 했다. 앞쪽에서는 컨설팅 회사가 이끌고 뒤쪽에서는 시스템통합(SI)업자들이 힘차게 밀었다. 미국의 유명 대기업 최고정보관리책임자(CIO)들은 동영상으로 새로운 솔루션을 통해 효과를 보고 있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혁신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마땅히 어디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던 우리나라 기업들은 일단 효과가 검증된 솔루션이라는 말에 너도나도 앞다퉈서 컨설팅 회사와 용역 계약을 맺고 외국 솔루션을 도입했다. 그리고 도입 후에는 도입 전에 컨설팅회사가 적어 준 도입 효과를 그대로 복사해서 우리도 이런 효과가 있었다고 했다.
알파고 열풍이 식는데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의 열풍은 얼마나 갈까. 알파고든 제4차 산업혁명이든 내용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대단히 큰 개념들이고 뿌리가 깊은 주제들이다. AI와 제4차 산업혁명을 독립적인 주제로 똑 떼어서 그것을 우선적으로 정부가 주도해 보겠다고 하는 것도 과학기술의 뿌리를 너무 얕게 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려고만 하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기업, 학계, 정부 모두가 달려들어서 총력을 기울여도 기초과학과 소프트웨어(SW) 개발 실력이 약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벅찬 과제들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대단하게 시작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바로 본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논의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더 얘기하자고 해도 할 얘기가 없는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 기초한 우리만의 발전 전략을 갖지 못하고 항상 해외에서 부는 새로운 유행에 급하게 추종하려고만 할까. 그리고 정말 말처럼 산업혁명급 추세에 편승해서 대대적인 혁신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말 혁신을 제대로 해본 회사가 있기는 하는가? 내부의 정보기술(IT) 실력이 혁신을 지원할 역량이 있는가? 연구개발(R&D)에서 원하는 새로운 주제를 프로세스화하고 시스템화할 IT 개발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뭔가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려고 하면 항상 외부에서 사람을 불러야 하지 않는가? 지금 기업들의 IT 운영과 개발을 IT 정직원들이 직접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대기업들은 IT 운영과 개발을 그룹 SI 회사에 외주를 주고 있고, 그 회사는 다시 갑을병정으로 이어지는 하청 구조로 원가 절감하고 있지 않는가? 개발자들은 실제로 쓰지도 않을 것 같은 요구 조건을 기한 내에 맞춰 개발하겠다고 밤새우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기업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지금 알파고, 제4차 산업혁명을 논하고 변화에 동참해야 한다고 떠들 때가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에서 IT비용은 인건비, 감가상각비 다음으로 큰 비용 항목이다. 무지 비싼 대용량 슈퍼컴퓨터 속에 우리 경영자들은 어떤 데이터가 잠자고 있는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들이 자신의 경영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수천억을 들인 차세대 시스템이 정말 그렇게 투자할 필요가 있었는지, 정말 계획된 효과가 있었는지 어느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개발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자신 있어 하지만 효과에 대해서는 꼬리를 내린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IT 기능을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대형 IT 개발 프로젝트를 관리할 능력은 부실하다. 우리나라 IT 현실이 지금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이런 우리의 한심한 IT 현실을 생각할 때 알파고, 제4차 산업혁명 같은 새로운 주제들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의 기막힌 IT 현실을 파괴적으로 혁신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CIO포럼 명예회장(명지대 교수) kt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