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한국 벤처기업은 존재감을 분명히 했다. 공식 인증기업 수 3만1000개, 1000억원 매출을 넘긴 기업이 460개를 넘었다. 1997년 10년 한시법으로 제정된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기반해 정부가 인증한 벤처기업에 세제 감면, 자금 지원, 공간 제공, 코스닥 상장 우대 등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혁신을 주도하는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 시각이 적지 않다. 과도한 정책 개입이 오히려 시장 생태계 발전을 저해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앞으로 10년 벤처정책의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20년 전 벤처정책은 확실한 정당성과 필요성이 있었다. `고위험·고수익` 벤처기업이 커 나가기에는 너무도 미흡한 토양에서 총체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적절했다. 이후 벤처기업은 때 마침 불어온 세계 정보화 흐름을 타고 급속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성공한 기업이 강소기업이 되고 중견벤처가 됐다.
그럼에도 벤처 생태계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파급효과는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벤처기업 혁신 생태계가 아직 자력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국민경제가 기대하는 역할에 미흡한 수준이라는 평가다. 그러다 보니 기회형 창업을 만들어 내는 기업가정신 순위가 세계 32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안에서도 낮은 수준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는 정부책임론이다. 2000년대 초반 벤처거품이 꺼진 이후 비판 여론에 편승해 정부가 벤처 활성화에 미온 태도를 보엮다는 것이다.
둘째는 벤처책임론이다. 벤처기업이 정부 육성책에 안주, 혁신성 제고와 생태계 발전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인터넷 버블이 꺼진 후에도 지속해서 우량 벤처기업이 탄생하고 성장, 국제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아마도 정부와 벤처기업 모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벤처 부진에 대한 좀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은 시장한계론을 들 수 있다. 협소한 국내 시장으로 말미암아 시장 기회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고수익(High Return)을 전제로 한 벤처 활성화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산업화를 주도한 미국은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시스코,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등으로 계보를 이어가며 정보화와 창조화를 선도하고 있다. 중국도 자체 거대 시장을 무기로 미국 주도의 혁신 생태계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거대 시장이 혁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투자 대비 기대 이익이 100배, 200배인 게임과 10배 게임은 본질에서 차이가 있다.
앞으로 10년이 걱정이다. 전 세계로도 미국과 중국 같이 자체로 거대 시장이 없는 나라는 대부분 시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개입하는 추세다. 벤처기업의 역할도 변화해야 한다. 제조업 중심의 기술추격형과는 다른 새로운 혁신 생태계로 진화해 나가야 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기술 융합 추세와 중국 경제의 굴기 등 거시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벤처기업은 대부분 제조 중심의 기술 창업이 주류이다. 벤처란 원래 기술뿐만 아니라 창의형 아이디어와 비즈니스 모델로 승부하는 모든 기회추구형 창업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리고 지금은 선발(First Move)과 시장 글로벌화를 선도해야 한다.
이에 따라서 3기 벤처정책은 극한의 불확실성에 전략으로 대처해야 하는 벤처기업이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과도한 정책 개입`이라는 명분론에 밀려 법 자체를 폐기하기에는 우리 현실이 너무나도 엄중하다. 우리 미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나가야 할 정도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3기 벤처정책의 지향점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창의형 아이디어에 도전하려는 인재의 뜻과 의지를 키워 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극한의 불확실성은 누가 성공할지 미리 선별하기 어렵게 한다. 지원 대상을 미리 선별해 육성하려는 정책은 효과성이 점점 떨어진다. 이에 따라 경제 주체의 창의형 도전을 보호하고 격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꿔야 한다.
둘째 도전을 반복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극한의 불확실성 시대에서 성공은 무수한 실패와 기다림 위에서 탄생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도전을 제도로 뒷받침해야 한다. 창업실패에 대한 재도전 기회와 사회 보장 강화, 자기자본 중심의 창업 활성화 등이 필요하다.
셋째 기대 목표시장 규모를 키워야 한다. 성공으로 획득할 수 있는 기대 수익이 커야 창업이 촉진된다. 독과점 구조 혁파와 규제 해소를 통해 국내 시장 기회를 키우고, 중국 내수시장 등 글로벌 시장 기회를 적극 활용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3기 벤처법은 정책 지원을 위한 인증제도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모든 경제 주체의 벤처정신, 즉 창의형 도전을 인정하고 그 권리를 보장해 주는 기본법이 돼야 한다.
이장우 경북대 교수·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