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제조업 노마드

[기자수첩]제조업 노마드

노마드는 `유목민`이라는 뜻이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유목민의 삶은 다양한 철학 이론에 영감을 줬다. 질 들뢰즈는 특정한 가치나 삶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추구하는 사유를 `노마디즘`으로 정의했다. 자크 아탈리는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시·공간을 초월하는 삶을 `디지털 노마드`라고 불렀다. 변화와 이동이 일상이 된 현대사회의 단면이 담겼다.

제조업도 노마디즘에 진입한 지 오래다. 기술 혁신 주기가 짧아지고, 생산비 절감이 화두로 떠올랐다. 물리적 생산 기지는 끊임없는 `유목`에 돌입했다.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이 주춤하고 베트남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삼성, LG 같은 대기업이 이동을 이끌었다. 후방산업의 생산기지 이동이 이어졌다.

그런데 벌써 다음 행선지 얘기가 나온다. 일부 업체가 필리핀을 주목하고 있다. 기업들의 베트남행 러시가 줄을 잇자 인건비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아이엠, 하이소닉, 코렌 같은 전자부품 업체가 필리핀에 진출한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이제는 `머무르는 곳`이 아닌 `거쳐가는 곳`이 될 전망이다. 이른바 `슈퍼 노마드`로 불릴 만하다.

요즘 후방산업계의 화두는 단연 `다변화`다. 다양한 제품을 다양한 고객사에 판매해야 알짜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특정 산업에 매출이 집중되면 위험이 높다. 수요 산업 경기가 꺾여도 언제든 다른 수익을 찾아 옮길 수 있는 기동력이 생명이다. 유연 생산이 이들 기업의 무기다.

유연 생산, 매출 다변화에는 관리 역량이 필수다. 전략적 투자 결정이 생산 품질만큼 중요하다. 얼마 전 유력 연성회로기판(FPCB) 업체가 상장 폐지되며 위기에 몰렸다. 요즘 가장 뜨거운 베트남 투자에 적극성을 보이던 회사다. 업계는 무리한 투자를 원인으로 꼽는다. 뜨는 곳을 골라 쏟아붓는 식의 투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산업계의 전략과 별도로 정부도 대책이 필요하다. 제조업 공동화 우려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최근 5년 동안 28.5%까지 증가했지만 부가가치 증가율은 5.2%로 줄었다. 해외 생산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국가 경제 기여도가 줄었다는 얘기다. 제조업 노마드 충격파를 최소화할 연착륙 전략, 기존 산업 공백을 대체할 고부가 산업 유치 전략이 절실하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