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에 선발(先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있다. 우리 경제가 추격자 길에서 벗어나 선발 주자(First Mover)라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발이라는 새로운 화두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아직 부족한 편이다.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 경제 주체들의 행동 양식을 가장 많이 지배해 온 단어는 아마도 선진(先進)일 것이다. 선진 경제, 선진 사회, 선진 교육, 선진 기업 등에서 보듯이 남을 따라잡고 앞서 나가는 것이 한국인의 꿈이고 도전 목표였다.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 발전 단계가 다른 나라보다 앞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오늘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선진이라는 단어 가치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싸늘해졌고, 급기야 747이라는 선진 경제 목표를 내건 이명박 정부를 크게 당황시켰다. 국민은 삶의 질과 동떨어진 선진이라는 단어에 피곤을 느꼈고, 젊은이는 일등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다. 남보다 앞서 있는 모습에 `재수 없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새로운 가치와 꿈을 추구해야 할 단계를 이미 지난 것이다.
새로운 화두, `선발`은 남보다 먼저 일을 시작하거나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먼저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선발이 의미하는 행동 양식은 이른바 `첫 번째 펭귄`으로 잘 표현된다. 수백 마리 펭귄이 먹이를 찾아 천적들이 우글대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펭귄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장 먼저 뛰어든 선발주자 펭귄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 이후 그 첫 번째 펭귄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잘 모른다. 아마 누구보다도 큰 먹이를 차지했을지 모르지만 미리 노리고 있던 물범의 밥이 됐을 가능성도 크다. 그 위험 때문에 나머지 펭귄은 오늘도 선발 주자로 쉽사리 뛰어들지 못한다. 선발이란 그런 것이다.
선발 주자가 위험 감수 덕분에 산업에서 누릴 수 있는 이점은 크다. 첫 번째는 연구개발(R&D) 성과와 특허를 무기로 기술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누구보다도 먼저 희소한 자산을 선취함으로써 이점을 얻을 수 있다. 세 번째는 고객과 먼저 친해지고 브랜드라는 진입 장벽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발 주자 우위(Advantage)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명확한 연구 결과가 부족하다. 비즈니스 경험에 의하면 선발 주자보다 후발 주자 입장이 전략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평가도 많다. 다음과 같은 후발 주자가 누릴 수 있는 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무임승차 효과다. 제품 개발, 고객 확보, 인재 양성 등에 선발 주자가 먼저 투자해 놓은 것을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다. 선발 주자가 어렵게 개발한 기술을 모방하거나 선발 주자가 교육·훈련시킨 숙련 노동력을 데려옴으로써 비용과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둘째 기술 상품화에 필요한 보완 자산을 활용, 더 큰 이점을 얻을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해당 분야에 대한 기초 지식, 유통망, 마케팅 경험 등이 없으면 그 보완 자산을 소유한 후발 주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셋째 개선된 기술이나 고객 불만 사안을 이용함으로써 이점을 얻을 수 있다. 기술과 소비자 욕구는 계속 변화하며, 이러한 변화에 신속하게 반응함으로써 경쟁우위를 뒤집을 수 있다.
넷째 선발 주자의 타성과 허점을 이용할 수 있다. 이미 규모가 커진 선발 주자는 상대적으로 고정자산 투자가 많고 조직도 유연하지 못한 사례가 많다. 반면에 후발 주자는 변화에 유연하고 민감하게 대응함으로써 이점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후발 추격자가 누릴 수 있는 이점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선발 주자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념적으로 선발 주자가 되려 하거나 더 나은 전략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과 프런티어 정신은 경제 주체로 하여금 선발 주자가 되고자 하는 이념의 기반이 됐다. 이 기반 위에서 산업화와 정보화, 창조화 시대를 모두 거치면서도 선발 주자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 경제는 선발 주자 전략 이외의 다른 대안이 마땅치 않은 상황으로 점점 내몰리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에게 선발이란 새로운 꿈이자 도전 목표가 되고 있다. 이때 선발은 과거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발 추격자 시절에는 미래 목표를 정하고 계획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선발 주자는 성장 계획보다 생존이 중요하고, 기회를 기다리며 반복해야 한다. 선발 주자가 되려면 새로운 행동 양식을 익혀야 한다.
이장우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경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