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에서 연구년을 보낼 때였다. 공공 도서관에는 외국인을 위해 영어회화를 무료로 가르쳐 주는 자원봉사자가 많았고, 우리 늦둥이도 그 지역의 로망 직장인 마이크로소프트(MS)에 다니는 유망 전도한 청년에게서 배웠다. 그 바쁜 직장생활에서도 짬을 내 자원봉사를 하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이렇게 자원봉사를 해야 제 마음이 행복합니다. 또 청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종종 소프트웨어(SW) 개발에 대한 영감을 얻곤 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예부터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는 묻지 마 살인, 각종 시험 문제의 사전 유출, 친구로서 감싸야 할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왕따 등과 같은 소식을 접할 때면 우리의 인성 교육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정파 이기주의에 따른 단기성 업적주의식 교육정책에 대한 불신은 날로 심해져서 교육부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자조 섞인 농담까지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로서는 교육 당국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제자들의 지식 배양뿐만 아니라 인성교육에도 앞장서고 있는지 반성해 본다.
지인 가운데 대학원생을 독특(?)하게 양성하는 교수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대학원생 제자 모임 때 `학위 과정 중인 제자`보다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제자`가 훨씬 더 많이 모여들어 주위의 부러움을 산다는 것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을` 입장이기 때문에 지도교수님께 눈도장을 찍기 위해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다가도 졸업하자마자 `을`에서 해방되면 함흥차사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 비결의 하나는 `을` 입장인 학위 과정 제자들에게 경제 부담을 전혀 주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라도 `을` 입장인 학위 과정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하게 되면 오히려 교수 자신이 계산하고, 제자들은 학위를 취득한 이후에야 비로써 계산할 권리(?)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에 보답하듯 초창기의 제자들이 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재문회에 거금을 쾌척하면서 “이제는 제자들을 위해 교수님께서 더 이상 돈을 쓰지 마시고 이 돈을 쓰십시오” 하더라는 것이었다. 과정 중에 제자들의 부담이 없게 되자 그 보답으로 졸업 후 쾌척이 상식으로 되는 재문회의 선순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둘째로 독특한 이유는 석·박사 취득 기간이 다른 교수 제자들보다 짧지만 제자들은 최우수논문상이나 각종 학술지에 꾸준히 게재해 왔다고 한다. 단기간 졸업의 비결은 주 1회 논문지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학 시절에 은사님이 매주 1회 논문지도를 해 주시던 전통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실천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논문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은 열심히 학위 논문에 몰두해도 통상 지도교수님이 피드백을 몇 달 만에 한 번씩 해 준 결과 학생은 할 일없이 마냥 시간을 허비하는 것과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었다.
셋째 그 교수의 교육 방식이 독특한 이유는 인성 교육을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다.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실력뿐만 아니라 생뚱맞은 인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실력`은 제자가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고 `인성`을 갖춰야 비로소 성공의 충분조건이 완성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실력을 갖추고 인성까지 훌륭하면 사회 어디에서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너무나도 확고한 결과였다. 필자도 시애틀에서 겪은 선진국의 필수조건 또한 인성 교육이었다.
이상 세 가지를 실천하기 위해 그 교수는 평소에 대학원생 제자들에게 “실력을 갖추고 사람이 되자” “협찬은 학위 취득 이후에”를 재문회 행동 강령으로 세뇌 교육을 시키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기원전인 그 옛날 우리 인생의 삼락 가운데 하나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得天下英才 敎育之)”이라고 했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에만 관심을 두고 선진국의 필수조건인 인성 교육까지 `가르치는 것`에는 무관심하지는 않은지, 아니면 `천하의 영재를 얻어`조차 관심이 없는지 필자부터 반성해 본다.
오재인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 jioh@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