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식 전기요금 체계.`
우리나라 전기요금에 대한 에너지 전문가들의 일반 평가다. 우리나라는 100GW에 이르는 전력 공급 설비를 갖추고 세계 최고 전력 품질과 서비스를 자랑하고 있지만 시장과 가격 체계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누진제로 촉발된 요금 불만과 산업계의 불협화음은 2001년 전력 산업 구조 개편 이후 15년 넘게 줄곧 정책 논리로 전력 시장을 운영해 온 이유가 크다. 빙산의 일각인 누진제 문제를 넘어 전기요금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할 때가 왔다.
◇누가 전기 `요금`을 `세금`으로 만들었나
이번 누진제 논란에서 전력 당국은 전기요금이 사실상 세금과 성격이 같다는 점을 시인했다. 누진제에 있는 소득재분배 기능, 누진제 완화에 따른 부자 감세 논란 언급이 대표 사례다. 그동안 전기요금은 사용한 만큼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요금이라며 시장 논리에 따라 산출된 적정한 가격임을 강조해 온 외침은 공염불이 됐다.
2001년 전력 산업 구조 개편 이후 발전 시장이 개방되고 판매 시장은 독점을 유지하는 기형 산업 구조에서 전기요금은 시장 가격과 동떨어져 왔다. 발전소들의 전력 생산 단가와 이를 사들인 한국전력공사의 구매비용은 소매시장 전기요금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011년 9월 15일 순환 정전 이후 지금까지 네 차례 전기요금 인상에서 가장 큰 명분은 도매시장 가격이 아닌 한전의 적자 경영이었다. 2011년 9월 ㎾h당 150원대이던 전력 도매시장 가격이 2012년 8월 250원대로 100원가량 오르기까지 1년 동안 정부는 전기요금을 두 차례 인상, 소매가격을 9.4%만 올렸을 뿐이다.
지금은 반대 상황이다. 지난해부터 폭락을 거듭한 전력 도매가격은 60~70원 선을 오가고 있지만 전기요금은 여론 뭇매에 누진제만 한시 완화한 상태다. 한전의 2011~2013년 손해를 현재 수익으로 메꾼다고 봐도 무방하다.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 신호가 작용하지 않는 시장은 더 이상 시장이라고 할 수 없다. 수요가 많아지고 생산비가 비싸면 가격이 올라가고, 반대 상황이면 가격이 내리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 원칙에서 일반 현상이지만 전기만큼은 최종 소비자가격을 정부와 정치권이 정했다.
현재 전기요금은 한전이라는 대형 공기업이 단일 독점사업자로 군림하고, 상품은 정해진 가격으로 사용해야 하는 구조다. 소비자 입장에선 해당 요금제에 불만이 있어도 달리 선택권이 없다. 단일 요금체계는 `무관심`을 유발한다. 좀 더 저렴한 요금을 위한 비교 대상이 없으니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다. 전기요금을 세금으로 인식하는 큰 이유다.
이 같은 사회 인식은 전력 시장 운영에 걸림돌로 되돌아온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전기요금 개편도 마찬가지다. 여론이 이번 개편을 `요금체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금 징수 체계를 바꾸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반발은 클 수밖에 없다. 전기요금을 정작 바꿔야 할 때 바꾸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나중에 손익을 소급 적용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셈이다.
이젠 국가 전력수급 운영을 정책으로 할지 시장 원칙으로 할지 명확히 정해야 할 시점이 왔다. 일단 정부는 지난 6월 에너지 공기업 구조 개편을 통해 발전공기업 상장, 민간 참여 확대 계획을 밝히는 등 시장으로의 운영 기조를 공론화했다. 이를 위해선 `전기요금=세금`이라는 고정 관념 변화와 단일 사업자·요금제의 구시대식 체계에 변화가 필요하다.
◇달라진 소비 패턴 근거한 다양한 요금제 필요
현재 전기요금 개편과 관련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곳은 지난 18일 공식 출범한 당·정 태스크포스(TF)다. 전력업계는 당·정 TF가 꺼낼 카드로 누진제 구간 및 누진율 완화와 함께 계절별·시간대별 요금, 연료비연동제 등을 꼽고 있다. 당정 TF는 답을 정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상황에서 요금체계 전반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업계는 이번 기회에 전력 시장의 판이 바뀌길 기대하고 있다. 달라진 전기 소비 패턴과 산업구조를 반영하고, 도매시장과 소매시장이 상호 연동하는 다양성 및 유연성을 동시에 갖춘 개편안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누진제 논란 역시 달라진 소비 패턴을 반영하지 못한 탓이 크다. 현행 누진제는 4구간이 301㎾h 이상 사용자부터 사용량 요금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구조다. 한 달에 300㎾h 초과 사용자들이 평균보다 많은 전기를 사용한다는 판단에서다. 계절이나 시간과 상관없이 월간 사용량이 많은 소비자가 전력계통 부담을 유발한다는 추측이 깔려 있다.
반면에 한전의 지난해 누진구간별 사용량을 보면 5월 3구간과 4구간 고객 비중이 34.9% 대 19.3%이던 것이 8월에는 23.8% 대 27.2%로 역전됐다. 400㎾h 초과와 500㎾h 초과 고객도 각각 2.1%, 0.4%에서 12.3% 및 4.0%로 뛰었다. 현행 누진제 규정처럼 300㎾h 초과 사용부터 전기 과소비로 분류할 수 있는지 다시 따져봐야 한다.
복수 요금제 운영도 전향 검토를 해야 할 대안이다. 전기요금 폭탄 논쟁에서 가장 많이 비교되는 대상이 통신요금이다. 4인 가구 기준 전기요금이 10만원 선을 넘으면 `요금폭탄` 꼬리표가 붙는다. 반면에 통신요금은 이미 3년 전에 4인 가구 20만원 시대를 넘어섰다. 요금에 대한 시장반응이 명확히 엇갈리고 있다. 전력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요금제의 다양성에서 찾는다.
2200만 가구 수요 패턴을 단일 요금 체계로 감당할 수는 없다. 가구마다 가족 구성원과 세대, 거주시간, 사용기기 등 생활 전반에서 수많은 변수가 있다. 고객이 통신요금을 줄여 보기 위해 서비스를 합치고 데이터 사용 패턴에 맞춘 상품을 계약하듯 전기요금에서도 소비자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전이 시범 사업으로나마 지역을 선정, 계절별·시간대별 요금과 누진제를 병행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전력 업계는 당·정 TF가 요금 체계 전반을 훑어 보겠다는 의지대로 도·소매시장 모두에 걸쳐 가격 신호가 작용하고 다양성과 유연성이 갖춰진 새판이 짜이길 기대하고 있다. 발전과 판매 겸업을 허용하고, 사업자와 고객 간 계약 거래 도입도 대안으로 제시한다. 당·정 TF의 결론이 새로운 누진제와 새로운 요금 정산법 설계만으로 끝나면 지금과 같은 불만과 논란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전력 분야 관계자는 “지금 우리나라 전력 시장은 겉으로만 시장 흉내를 내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시장 논리 원칙을 따르기 어렵다면 차라리 과거 한전에 모두 통합된 형태로 회귀하는 편이 낫다”고 꼬집었다.
자료:산업통상자원부
자료:산업통상자원부
조정형 에너지 전문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