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과거 고도 성장기에 제조업을 기반으로 선진국에서 먼저 개발해 놓은 상품을 빠르고 유효적절하게 추격, 마침내 선도자를 추월하고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경험이 있다. 녹화재생기(VCR), 디지털녹화디스크(DVD) 플레이어, 평면TV, 세탁기, 에어컨,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이 그랬다. 우리 기업은 선진 경쟁자가 선점한 시장을 치열하고 정교한 경쟁 분석을 통해 따라잡을 수 있는 요소를 찾아냈다.
고급 인재는 가족을 뒤로 한 채 야근하면서 주말과 휴가도 제대로 못쓰고, 엄청난 밀도의 연구개발(R&D)로 선도자를 따라잡고 추월해 선도하는 위치를 점하는 식이었다.
`추격경제의 추억`은 우리 산업이 패러다임을 바꿔서 새로운 판을 짜고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저성장 시대를 맞아 경쟁은 고도화되고, 기존의 경쟁 방법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업계의 상위권 절대 강자가 아니라면 제자리에 머무르거나 도태되는 경우가 많다. 추가 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구사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체 이 `새로운 판`과 다른 방식의 경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답은 경쟁자가 아니라 고객에게서 찾아야 한다. 추격 경제에서 경쟁자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분석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새로운 판과 다른 경쟁에서는 고객으로 하여금 내가 만든 상품을 원하도록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삼아야 한다.
업계와 학계의 많은 연구가 앞으로 고객은 상품이 제공하는 단순한 물리 형태의 가치보다 감성을 충족시키는 상징 가치에 더 높은 지불 의향을 보이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두 회사의 와인 오프너가 있다. 기획서를 보니 D사 제품은 맥주 마개도 딸 수 있고, 재료비가 저렴하며 생산 단가도 낮아 가격 경쟁력이 좋다. A사 제품은 재료비가 매우 높으며, D사보다 디자인이 뛰어나고, 가격 또한 높다.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까. 알레시(Alessi) 안나 와인오프너는 집들이 선물로 손색이 없고, 와인 마개를 따는 용도 외에 장식용으로도 인기가 높아 저렴하고 실용성 있는 다이소 제품보다 30배에 이르는 개당 8만7000원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세계 베스트셀러를 누리고 있다.
유사한 기능이라면 디자인이 좋은 상품이 높은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고, 유사한 가격이라면 디자인이 좋은 상품이 선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현상은 디자인이 좋은 상품은 감성을 충족시켜 상징 가치가 큰 데서 기인한다. 상징 가치의 원천으로는 디자인, 브랜드, 스토리 등이 있다. 한 기업이 좋은 브랜드를 갖춰서 수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엄청난 투자와 긴 시간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수한 디자인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역량 있는 디자이너를 고용하거나 디자인회사의 도움을 받아 다소 단기간에 낮은 비용으로 이뤄 낼 수 있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단순히 감성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일까. IDEO 창업자의 한 명인 데이비드 켈리는 디자인적 사고로 기업 전반의 혁신을 이뤄 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디자인적 사고는 `창조적 사고로 남이 생각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다르게 풀어 가는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적 사고를 통해 인사제도 혁신을 이룬다든지 물류 체계를 획기적으로 효율화하고 신사업 먹거리를 발굴해 내는 등 회사 경영 활동 구석구석에 창조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돌파구 마련이야 말로 디자인적 사고의 진정한 쓰임새라 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세계 경쟁력을 갖춘 디자인 교육자, 전문 디자이너, 디자인 전략가가 다수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인재 인프라와 경쟁력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상징 가치 혁신과 제반 경영 혁신의 효율 높은 도구로 삼아 많은 국내 기업이 오늘날 저성장 추세의 어려움을 딛고 한 걸음 더 도약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이철배 LG전자 이노베이션사업센터-LSR/UX연구소장(전무) lgedesign@lg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