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그룹이나 어지간한 중견기업에는 2인자가 있다. 그룹이라는 것이 회장 중심이지만 회장이 모든 면에서 나서면 책임질 일도 많고 세세한 내용은 잘 모르기도 하니 자신을 대신하는 대리인 같은 2인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회장은 2인자에게 자기의 철학과 생각을 집중적으로 전수해서 가끔 자기 대신 결정을 하더라도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양성한다. 회장 분신과 같은 2인자는 그룹 내에서 회장의 생각을 자기가 가장 잘 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래서 다른 임원들이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회장의 진정한 뜻이 뭔지를 이들에게 묻기도 한다. 이들의 충성심이 자연스럽게 자부심으로 연결되고, 가끔은 그룹이 자기 것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조찬 모임에서 한 강사가 서양에서는 배우자의 죽음이 가장 큰 스트레스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식의 죽음이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했다. 외국은 수평적 문화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수직적 문화이기 때문이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외국의 선진 대기업에서 우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2인자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느 조직이나 2인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회장과 자기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지 `우리처럼 회장 생각이 내 생각이고 내 생각이 곧 회장 생각`이라고 하는 그런 동일성은 강조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 본능적으로 수직적 관계에 익숙하다. 어렸을 때 집안에서도 부모에게 힘의 역학을 배운다. 그리고 가족 위아래 서열을 생활 속에서 배우며 자란다. 학교에서 따돌림이란 사실, 같은 학생이라는 수평적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강요하는 움직임일 뿐이다. 군대는 물론 회사에 가서도 우리는 수직적 관계를 생존 차원에서 경험하고 익히게 된다.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갑질이라는 것도 자기가 사회적 서열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소리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를 서열화하고 위아래의 순위가 명확해야 마음이 편하고 조직이 평화로워지는 그런 기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수직적 문화가 사라지고 정말 평등한 수평적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조직의 위아래는 있지만 조직을 나오면 개인적으로는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수평적으로 다르지 굳이 위아래로 서열화하려고도 않는다. 그래서 회사 일과 개인 일을 엄격히 분리해서 생각한다. 선진국 월급쟁이들은 회사와 가정만을 오고 가지 우리처럼 저녁에 자주 회식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잦은 회식 문화는 수직적 문화에서만 가능하다.
한 식구라는 것은 함께 밥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함께 밥을 먹으니 수평적인 것이 보여도 밥 먹을 때 수직적 서열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높은 사람이 제일 상석에 앉고 그다음 서열로 알아서 자리를 잡는다. 술을 권하는 순서도 서열 순이다. 회식의 시작 시간도 끝나는 시간도 다 높은 사람이 정한다. 이렇게 조직 내 서열이 명확하게 작동되는 것을 보고 느끼고 확인하기 위해 회식을 하는 것이다. 올림픽 출전 배구 선수들이 회식을 했니 안 했니 하는 것이 언론의 기사거리가 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회식을 조직 운영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수직적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한 우리는 창조경제가 꽃을 피울 수 없다. 수직적 문화에서는 톱다운 상명하복은 있어도 버텀업의 제안이나 창의성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플랫폼 시대다. 생태계를 만들 수 있으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망한다. 생태계는 서로 수평적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서로를 위아래로 인식하면 명령과 지시가 있을 뿐이다. 서로를 수평적으로 인식해야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고, 그래야 융합 솔루션이 나온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자기들끼리 그룹을 형성하고, 자기들끼리만 오래 잘살자는 폐쇄적 경영이 설 자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4차 산업 혁명이 꽃 피우려면 수평적 문화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창업자들을 보면 권위주의하고는 거리가 멀다. 마크 저크버그가 동료 프로그래머 옆에 앉아서 일하는 사진이 있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열심히 가상현실(VR)을 보고 있는데 여비서는 무심히 자기 모니터를 보고 있는 사진이 화제가 되고 있다. 대통령이 햄버거 가게에서 손수 점심을 사 가지고 나오고,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도 흔하고, 영부인이 스스로 망가지기도 한다.
재벌그룹 2인자가 자살한 기사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 수직적 문화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새삼 깨닫게 됐다. 삼가 명복을 빌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한다.
CIO포럼 명예회장(명지대 교수) kt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