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대다수가 카카오톡을 사용하지만 개발과 성장 과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카카오(Kakao)`라는 이름의 유례만 해도 내부에 여러 설이 있을 정도다. 특정 직원이 지었다는 얘기도 있고 직원 투표로 정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영문 `Kakao`라는 이름도 누르기 편한 위치의 자판을 조합했다거나 `Cacao`로 하려니 URL 등록이 어려워서 지금의 형태로 지었다는 등 설이 다양하다.
카카오톡은 카카오 전신인 `아이위랩` 시절에 김범수 카카오 의장의 미국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장이 미국에 체류할 당시 애플 아이폰이 처음 출시됐다. 모바일 시장 가능성을 본 김 의장은 애플리케이션(앱) 개발에 착수했다.
처음부터 카카오톡에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서비스를 시도하다가 카카오톡이 대표 주자가 됐다. 카카오톡은 2010년 3월 iOS용 앱으로 처음 나왔다. 8월 안드로이드용으로 나오면서 진용을 갖췄다.
박창희 부사장은 “카카오톡 이전에 회사는 웹 2.0 기반의 커뮤니케이션 소셜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였다”면서 “내부 구성원 가운데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모바일 서비스 프로젝트 몇 개를 진행했다”고 회상했다. 박 부사장은 카카오톡 안드로이드용 개발부터 최근까지 카카오톡팀을 진두지휘했다.
스마트폰 초기 시절에 나온 서비스이다 보니 앱 개발 경험 부족으로 어려움도 겪었다. 서비스가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 트래픽을 감당하기 위한 기술 조치나 인력 등을 맞추는 것도 문제였다. 박 부사장은 “처음에는 이용자가 얼마나 쓰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면서 “벤처 입장에서 트래픽이 빠르게 증가하는 것을 따라 가는 게 기술상 굉장한 도전이었다. 내가 이용자라는 생각으로 피드백에 기민하게 반응했다”고 말했다.
카카오톡 급성장에는 감성을 강조한 `소셜` 기능 도입이 주효했다. 카카오톡이 나올 때 시장에는 이미 많은 모바일 메신저가 있었다. 카카오톡은 그룹채팅과 읽음 확인 기능을 넣었다. 당시 왓츠앱은 그룹 채팅 기능을 지원하지 않았다.
미니 프로필이 들어가면서 이용자가 소셜 서비스로 인식하게 됐다. 탈퇴 버튼 노출, 비주류 같은 느낌의 공지 등 이용자 친화형 소통 방식도 기여했다. 박 부사장은 “기존 서비스의 소통 방식이 딱딱하고 정형화돼 있어서 카카오톡은 작정하고 이용자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서비스로 만들었다”면서 “당시 이용자 100만명이면 성공한 시절이었는데 1000만명 돌파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용자 호응을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 메신저로 성장했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카카오톡은 초기 북미, 동남아, 일본에서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하지만 왓츠앱 등 거대 기업이 운영하는 서비스와 마케팅 경쟁을 벌이기 어려운 탓에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박 부사장은 “벤처 기업인 카카오로서는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에서 충분한 자금 마련이 어려웠다”면서 “일본 도호쿠 대지진 당시 이용자 소통에 기여한 점은 아직까지도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덧붙였다.
오대석기자 od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