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빅딜은 1997년 11월 한국에 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발단이었다. 김대중(DJ) 정부는 IMF 조기 탈출을 목표로 국내 은행은 물론 산업 대부분에서 통폐합과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DJ는 특히 재벌 개혁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1998년 1월 13일 이건희(삼성)·정몽구(현대)·구본무(LG)·최종현(SK) 회장을 불러 지배주주와 경영진 책임 부과, 재무구조 개선, 주력 업종 중점 육성 등 개혁 추진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핵심은 바로 `빅딜`이었다. 1월 22일 김원길 당시 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은 5대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반도체, 철강, 자동차 등이 과잉투자 산업입니다. 빅딜로 투자를 나눠야 해결됩니다. 던질 것은 과감히 던지세요.”
빅딜이라는 단어는 1997년 말 일부 경제연구소가 보고서에서 처음 언급했다. 재벌의 과잉 시설과 과다 부채를 해소하려면 빅딜을 이용한 사업 교환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정부 차원 논의가 공식화되자 경제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논란이 가장 큰 분야는 반도체였다. 1994~1996년은 반도체 호황기였다. 삼성전자·현대전자·LG반도체 모두 매출이 크게 올랐고, 그동안의 투자비를 회수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이익을 냈다.
그러나 1997년부터 반도체 산업은 불황 사이클에 접어들고 있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그해 각각 1835억원, 2897억원의 순손실을 내며 적자로 전환했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적자를 덜 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빅딜 대상이 된 이유다.

현대와 LG는 그동안 어렵사리 키워 온 반도체 사업을 자의 아닌 타의로 남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특히 반도체는 호황과 불황 경기 사이클이 늘 있어 왔기 때문에 이 시기만 잘 견디면 금세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 압력과 재벌 개혁에 국민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빅딜은 거부할 수 없는 당면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해 9월 3일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은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기자회견을 열어 7개 업종 구조조정안을 마련하고 그룹 간 양해각서(MOU)를 교환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현대전자 반도체사업과 LG반도체를 일원화하되 경영권 문제는 계속 논의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 이후 현대와 LG 사이에 반도체 경영권 확보 전쟁이 펼쳐졌다. 현대전자는 합병 시 최대주주 지분이 70% 이상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권을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반면에 LG는 5대 5 공동 경영을 하자고 제안했다. 현대와 비교하면 한 단계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재차 분리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을까. 그 당시 현대는 대북사업으로 DJ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현대에 다소 유리한 흐름으로 반도체 빅딜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다.
김영환 전 현대전자 대표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빅딜은 정부가 주도했지만 누구를 통합의 주체로 할 것인가에는 일절 간섭이 없었습니다. 실질적 평가나 교섭 등은 양사 간 조정에 맡긴 셈이죠. 정부는 구조조정 당위성만 제시하고 민간에서 결정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반도체 업종 논의가 가장 치열했던 것이 사실인데 현대와 LG는 서로 반도체 사업을 놓치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경쟁이 뜨거웠습니다.”
이희국 전 LG실트론 사장이자 현 LG 상근 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시 LG반도체 개발책임자(전무)로 회사 입장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통합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 측은 보다 깊은 입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업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통합에 반대했습니다.”
전경련은 두 회사가 공동으로 추천한 전문평가 업체 심사를 거쳐 우수한 평가를 받은 곳이 경영 주체가 되고 지분 70%를 가져가는 조정안을 발표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운명이 외부 평가업체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김영환 현대전자 사장과 구본준 LG반도체 사장은 평가 기관 선정을 위해 일곱 시간 넘게 협상을 벌였다. 양사는 평소 자신과 우호 관계에 있는 평가 업체를 집중 추천했다. LG는 매킨지 등 5개사, 현대는 가트너(데이터퀘스트) 등 5개사를 각각 선호했지만 일치하는 업체가 한 곳도 없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전경련이 미국 아서디리틀(ADL)을 외부 평가 업체로 추천했다. ADL은 반도체뿐만 아니라 석유화학·정유 산업 부문 평가 기관으로 선정된 업체로, DJ 정부 빅딜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앞서 현대전자는 반도체를 제외한 사업부를 매각하거나 분리, 재무 건전화를 꾀했다. 미디어 부문인 HDT, PC 부문인 멀티캡, 복사기 부문인 현대사무기기 등이 현대전자 둥지를 떠났다.
LG는 ADL을 신뢰하지 않았다. 현대전자는 ADL에 백지위임장을 제출하고 평가를 맡겼지만 LG반도체는 명확한 평가 항목과 기준 제시를 요구하며 계약을 거부했다. ADL은 현대전자의 공장 실사까지 벌였지만 LG반도체는 재무제표 등 공개된 자료만을 토대로 평가 작업을 진행했다.

정부는 LG를 공식석상에서 압박했다. DJ는 1998년 12월 중순 한 회견장에서 합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기업은 은행의 제재를 받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5대 재벌 가운데 한 곳이 반도체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12월 24일 발표된 평가 결과는 현대전자의 압승이었다. ADL은 “현대전자가 많은 분야에서 일관되게 우위를 보였다”면서 “통합사 경영 주체는 현대전자가 적합하다”고 발표했다.
김영환 현대전자 사장은 “평가 결과는 종합 및 객관화된 것이었다”고 환영했다. 구본준 LG반도체 사장은 “ADL 평가는 공정성, 객관성, 전문성 등 어느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면서 “LG반도체가 본 물질 및 정신 피해에 대해 ADL을 미국 법원에 제소하기로 했다”며 강력 반발했다.

LG의 반발은 꽤나 오래갈 것 같았지만 의외로 조속히 일단락됐다. 1998년 12월 30일 DJ 정권에서 금융 당국을 진두지휘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한 일식집에서 구본무 LG 회장을 만났다. 그는 구 회장에게 윗분(DJ)을 한번 만나 보라고 권유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이미 LG반도체의 자금줄을 죄고 있었다. 28일 시중 금융기관에 `LG반도체에 대한 금융 제재를 결의하라`는 메시지를 팩스로 전달해 놓은 상황이었다. 금융권은 곧바로 LG반도체에 신규 대출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구 회장은 LG그룹 전체에까지 여파가 미치면 더 버티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면담을 신청, 1999년 1월 6일 청와대에서 DJ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오간 대화는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의 저서 `위기를 쏘다`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선친이 물려 주신 반도체 사업입니다. 기술력이 우수하고 재무구조도 건전합니다.”
“…….”
DJ는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구 회장은 결국 준비해 온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포기하겠습니다. 기왕 포기하는 것 지분 전체를 현대에 넘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DJ는 크게 기뻐했다. “섭섭함이 없도록(데이콤 인수) 하겠다”고 구 회장을 위로했다. 1979년 금성반도체를 시작으로 20년 동안 반도체 사업을 이어 온 LG가 눈물을 머금고 LG반도체를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