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팹리스 산업계에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동안의 실패 사례를 거울 삼아 고객, 제품군을 다각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디스플레이 반도체 전문 팹리스인 티엘아이, 아나패스는 대표 팹리스라 불리던 업체가 쓰러져 갈 때도 묵묵히 성장해 왔다. LG 계열사로 편입된 실리콘웍스도 마찬가지다. 마이크로컨트롤러(MCU) 전문 업체 어보브반도체 역시 원만하게 사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
사업 영역은 다각화했다. 티엘아이는 낸드플래시 컨트롤러 분야에서 최근 개발과 상용화 성과를 냈고, 실리콘웍스는 차량 반도체 분야로 진입하고 있다. 어보브반도체는 MCU 기술을 기반으로 사물인터넷(IoT) 근거리 통신 모듈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업력이 다소 긴 텔레칩스와 넥스트칩도 최근 신규 시장 진입에 성공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텔레칩스는 차량 오디오비디오내비게이션(AVN)과 셋톱박스 시장에서 `강자`로 쑥쑥 크고 있다. 2020년 매출 5000억원을 달성하겠다는 장기 비전도 내세웠다. 카메라 신호처리칩을 전문으로 다루는 넥스트칩은 차량용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시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전력반도체 전문 업체 실리콘마이터스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올해 매출 2000억원을 바라보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기업 계열인 실리콘웍스를 제외하면 사실상 국내 최대 팹리스 업체로 도약했다.
세계 1위 품목으로 국내 대기업 고객사 한두 곳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업체도 나왔다. 스마트폰 카메라모듈 자동초점(AF) 드라이버 집적회로(IC) 분야 세계 1위인 동운아나텍과 보안카메라용 상보형금속산화반도체이미지센서(CIS)를 설계하는 픽셀플러스가 대표주자다. 터치와 페이용 칩을 전문으로 만드는 지니틱스 역시 최근 팹리스 반도체 업계에서 `뜨는 기업`으로 꼽힌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주목할 만한 신생 팹리스도 많다. 터치와 무선충전칩이 주력인 리딩유아이는 올해 매출액 100억원을 목표로 삼고 있다. 고음질·고출력 통합 오디오 시스템온칩(SoC) 설계 전문 아이언디바이스는 올해 국내 대기업 고객사 확보에 힘입어 고속 성장을 예상했다. 2020년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유일렉트로닉스는 해외 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열영상 센서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지난해 설립된 신생 업체 햅트릭스는 최근 지문인식 센서칩 시제품을 내놨다. 시냅틱스, FPC 등 세계 굴지의 업체와 경쟁할 채비를 마쳤다는 것이 햅트릭스 관계자의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9일 “과거 주요 팹리스 업체는 취급 품목과 고객사 숫자가 한정돼 있어서 부침이 심했다”면서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팹리스는 주력 제품과 고객사 쏠림 현상을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패스트 팔로어에서 벗어나 과감한 기술 전략으로 시장을 이끌어 가는 팹리스가 나타나야 한다”면서 “지금까지의 경험을 잘 살리고 실패 경험을 곱씹으면 세계를 호령하는 팹리스가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