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회피증후군

[데스크라인]회피증후군

대한민국 국민 9할이 `자괴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를 이루는 3대 요소인 국민, 주권, 영토 가운데 영토를 제외한 2개가 허물어졌다. 나라꼴도 말이 아니다. 선진 시민이 되려던 자존심에 형언할 수 없는 상처가 났다. 다시 `대한민국`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래도 `국민`이란 지혜로운 자원이 있어서 `주권`을 되찾을 것이란 기대까진 버리지 않는다.

기업인을 만났다.

그가 먼저 꺼낸 말은 “두렵다”였다. 우선 기업하기 두렵다고 했다. 안 그래도 힘든 불황에 이런 국가 변고를 만났으니 기업 활동이 위축될 것은 뻔했다. 소비는 줄고, 기업에 돌아가는 돈 흐름은 멈췄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임금 지급일에 각종 대금 결제일 등 지옥 같은 날의 연속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것은 자신이 택한 길이고, 일종의 `업보`이니 달지는 않아도 쓰게 넘길 수 있다고 했다.

진짜 문제는 두 번째, 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고 했다.

사실 사업이나 새로운 영역 창출, 시장 공급 등 모든 일이 사람 만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를 거치며 사람을 만나는 일과 관계를 증진시켜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두렵다고 했다. 아예 요즘은 가족이나 친지, 오랜 친구가 아니면 업무 외 별도의 시간이나 회사 아닌 장소에서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린다고 했다.

많은 사람에게 요즘은 말 그대로 `회피 시대`가 돼 버렸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강조한 것이 창조경제요, 새로운 비즈니스 창출이다. 그런데 정권이 끝나가는 지금 우리 사회는 지독한 `회피 증후군`을 앓고 있다.

무릇 사업 기회나 새로운 도전 과제는 아는 사람만 만나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전혀 다른 마당에서 뛰놀던 사람과 만나야 자기 세계의 한계가 깨지고, 새로운 영감과 자극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찾아지는 게 새로운 비즈니스요, 다른 차원의 접근법이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에선 이런 만남이 이뤄지지 않는다. 아예 멈췄다.

정부도, 정치권도, 언론도 매번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주창한다. 정부는 시간 있을 때마다 제도를 바꾼다느니 규제를 푼다느니 하는 방식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 하고, 대통령부터 솔선수범하겠다고 열심히 떠든다.

정치권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입법하고, 감세하고, 예산을 풀고 한다. 그러고는 무슨 일만 터지면 기업인들을 `가장 쉬운 놀잇감` 취급을 한다.

언론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업하기 좋아지도록 여론을 만들고 환경을 조성해야 하지만 늘 견제와 감시의 화살이 제 방향을 못 잡는다는 게 문제다. 때론 여론이란 이름으로 기업에 가시를 박는다.

결국 국격을 잃고 표류하는 대한민국 앞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곧 새해 초라고 밝고 훈훈한 기운이 찾아올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멀리 있지 않다. 기업인들이 자신 있게 자기 일하고, 벌어들인 것에 자부심을 갖고, 때론 응원도 받는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다. 요즘처럼 `회피 증후군`에 갇혀선 기업과 기업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진호 산업경제부 데스크 jho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