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무주의 맹시

[기자수첩]무주의 맹시

고릴라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된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은 시험을 통해 사람은 주의를 기울인 부분만 본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시험용 영상에서 농구공 패스 횟수에만 집중한 참가자는 중간에 등장한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를 `무주의 맹시`라고 한다.

신분증 스캐너 논란에도 무주의 맹시가 발생했다. 정책의 도입 취지보다 신분증 스캐너 자체가 부각됐다. 신분증 스캐너를 적용한 이유가 무엇인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 잊고 있었다.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KAIT)가 단초를 제공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분증 스캐너가 KAIT 수익사업이 아니냐는 의혹이 빌미를 제공했다.

전국이동통신유통협회(KMDA)는 당초 다단계와 방문판매 사업자가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스캐너를 대체한다는 이유로 오프라인 매장과 형평성이 어긋난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분증 스캐너 선정 절차와 적법성 여부를 집중 제기하고 있다.

신분증 스캐너를 도입하게 된 이유를 되새겨봐야 한다. 스캐너로 신분증 사본을 없앤 이유의 본래 취지가 개인정보 유출 등 피해를 막자는 것이었다. 일부 유통점에서 신분증 사본으로 대포폰을 개통하는 등 불법 행위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90% 이상의 유통점에 신분증 스캐너가 도입됐지만 4개월째 갑론을박이다. 방송통신위원회, KAIT, 이동통신 3사, KMDA 모두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다른 의견은 애써 무시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평행선 갈등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는 없고 자신들의 주장만 있다. 신분증 스캐너 운영 과정에서 오류 등 불편 사항과 유통채널별 형평성 논란은 풀어야 할 숙제다. 본래 취지를 공유하기에 앞서 이해관계자는 무주의 맹시부터 경계해야 한다.

함지현기자 goha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