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무기반도체와 유기반도체, 전자와 폴라론

김장주 서울대학교 교수
김장주 서울대학교 교수

반도체 하면 실리콘을 연상할 정도로 우리는 무기 반도체에 익숙하다. 그러나 최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물질로 대표되는 유기 반도체가 사용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유기 반도체 용어 일부는 무기 반도체와 다르다. 그 가운데 하나가 폴라론(polaron:편향자)이다. 무기 반도체에서 전자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유기물에서는 왜 전자를 전자라 부르지 않고 폴라론이라고 할까.

전자는 성격에 따라 이름이 다양하다. 전자의 기본 특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고립된 전자`를 상정한다. 음전하를 띠고 있으며, 무게는 양성자의 1840분의 1이다. 고립된 전자의 무게는 모두 같다.

인간사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듯 물질에서는 핵과 전자가 함께 원자를 구성한다. 가정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듯 원자와 원자가 결합해 수많은 재료를 만든다.

인간이 관계를 맺으면서 자유인, 이방인, 외톨이, 독신, 매인 사람, 핵심 인물, 주변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듯 물질 내부에서도 전자의 특성에 따라 자유전자·핵심전자·외곽전자·결합전자·파이(π)전자 등으로 일컬어진다.

금속의 최외곽 전자나 무기 반도체의 불순물에서 떨어져 나온 전자는 핵의 영향으로부터 멀어져 있어 움직임이 다소 자유롭다. 이를 `자유전자`라고 한다.

대도시의 독신에 비유할 수 있을까. 자유인의 움직임이 가볍듯 자유전자는 전기장이라는 외부 영향에 이끌려 전류를 잘 흐르게 한다.

실리콘으로 대표되는 무기 반도체는 자유전자의 특성을 기반으로 만든다. 컴퓨터 프로세서나 메모리 등 고속 전자 소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자유전자를 자유인에 비유한다면 폴라론은 평화로운 작은 마을을 방문한 이방인 또는 딸린 사람이 많아 주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무거운 이방인`이다.

이온 결합을 하는 물질과 유기 분자 물질 등에 주입된 전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방인 전자의 움직임에 주변 원자와 분자는 큰 영향을 받는다.

이온 결합 물질은 이온 형태로 존재한다. 소금(NaCl)을 예로 들면 양이온(Na+), 음이온(Cl-) 형태다. 음전하를 띤 전자(이방인)가 들어오면 양이온은 전자 쪽으로 당겨지고, 음이온은 전자에서 멀어진다.

전자는 주변 원자(이온)의 위치를 변화시키며 음이온과 양이온에 따라 편향(polarize)하게 된다. 편향하게 된다고 해서 전자는 폴라론(편향자)으로 불린다. 전자가 움직이면 이온이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전자의 움직임과 이온의 움직임은 분리되지 않는다. 자유전자처럼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다.

유기 분자 물질에 들어온 전자는 서부영화에서 조용하던 마을에 나타난 주인공과 같다. 주인공이 나타나면 여주인공뿐만 아니라 온 마을이 시끌벅적해진다.

몇 개의 원자(가구)로 이뤄진 작은 분자(마을)에 전자(이방인)가 들어오면 원자 간 거리 등 분자의 특성이 바뀐다. 이방인의 본래 몸무게가 가볍다 하더라고 주변의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움직임은 느리고 무겁다. 이 때문에 폴라론은 `무거운 이방인`으로 비유할 수 있다.

전자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유기 반도체로는 고속 전자 소자를 만들기 어렵다. 고속 전자 소자 제작에는 유기 반도체보다 무기 반도체가 유리하다.

비록 전자 속도는 느리지만 유기 반도체가 응용 범위를 확장하는 이유는 다른 면에서 좋은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속 특성이 필요치 않은 분야에서 주로 그 활용처를 찾아가고 있다.

유기 반도체는 전자가 느린 대신 빛을 잘 낼 수 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처럼 성능이 좋은 발광 소자를 만들 수 있다. 가볍고 얇게 만들 수도 있다.

무기 반도체와 유기 반도체 관계는 어떤 사람이 수학을 못해도 문학이나 예술에 재능을 보이고 인류 문화에 공헌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생물인 인간과 무생물인 전자 및 물질이 서로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인간의 이치가 자연의 이치이고, 자연의 이치가 인간의 이치라고나 할까.

새로운 1년이 시작됐다. 다양한 물질이 필요하듯 올해는 다양한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하게 어울려 사는 것을 꿈꾸어 본다.

김장주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jjkim@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