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500억원대 중견 통신장비 기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통신사 투자 감소에 따른 수익 저하, 고질적인 가격 후려치기, 비합리적 입찰 제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통신장비 업계 어려움은 심화되지만 당장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게 문제다.
12일 통신업계에 따르면 지난 2일 중견기업 A사가 계열사와 금융결제원 당좌거래정지 명단에 올랐다. 당좌거래정지는 기업이 발행 당좌수표나 약속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 처리된 상태로, 더 이상 당좌거래를 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A사는 설립 30년차 기업이다. 전송장비 등 통신장비 유통과 구축을 수행하며, 기술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2015년 매출 528억원을 올린 중견기업이기에 충격이다.
기업회생을 비롯한 후속 절차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A사에 광 모듈이나 통신 랙 등 부자재를 공급해온 중소기업과 정보통신공사 업계는 초초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장비를 공급했던 노키아(알카텔루슨트) 등 대기업, 국내 전송장비 업체 역시 우려를 나타냈다.
A사 관계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알고 있다”며 “통신장비 시장 수익성이 악화된 게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응책을 논의 중인데, 아직 결정된 건 없다고 덧붙였다.
〈뉴스의 눈〉
장비 업계에는 A사 같은 사례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라며 우려했다. 개점휴업 상태인 곳이 상당수라, 연이어 문을 닫는 곳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통신사 롱텀에벌루션(LTE) 투자가 마무리되며 장비업계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통신사 설비투자는 2014년(6조8710억원) 이후 지속 감소, 지난해 5조6983억원으로 줄었다. 5세대(5G) 이동통신나 사물인터넷(IoT)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까지 3~4년은 통신사 투자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해 상반기 실적 공시자료에 따르면 다산네트웍스, 에이스테크, 쏠리드, 우리넷, 코위버, 텔레필드, 기산텔레콤 등 주요 상장사가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흑자를 낸 유비쿼스도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이 20억원 이상 줄었다.
상장사가 아닌 매출 규모 100억원 미만인 중소기업 사정은 더 심각하다. 인력 구조조정, 임금 체불이 늘어나고 매물로 나오는 곳도 있다. 수익성이 나빠져 신규 연구개발(R&D) 투자를 못하고 제품 경쟁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일부 중견기업을 제외하고는 해외 진출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가격 후려치기도 장비업계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2015년 통신사는 모든 장비 납품가를 평균 25% 낮췄다. 공급가를 낮추지 않으면 장비를 납품할 수 없다고 `갑의 횡포`를 부린 것이다.
비합리적 입찰제 역시 수익성 저하의 요인이다. 지방자치단체 입찰 예규인 행정자치부 `지자체 입찰 낙찰자 결정기준`에는 저가입찰에 따른 불이익이 거의 없다. 예가 60% 이하로 투찰해도 감점이 미미해 출혈경쟁을 유발한다.
정부도 장비업계 사정을 알고 있지만 당장 뚜렷한 대책은 없는 상태다. 민간기업인 통신사에 억지로 투자를 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국산 통신장비가 사라지고 외산에 종속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내 기업으로 전가된다. 국가 통신경쟁력도 저하될 수밖에 없다.
통신장비 업체 임원은 “통신 분야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다른 분야로 활로를 모색하지만 성과를 거두는 곳은 거의 없고, 수익성만 더 나빠진다”며 “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 업체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다.
안호천 통신방송 전문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