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반도체 강국인 우리나라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최근 제주도에서 열린 자동차 기능안전 국제표준 회의에서 `자동차용 반도체 기능안전 설계 생산` 국제 지침(가이드라인)이 사실상 확정됐는데 국내 반도체 대기업과 중소 칩 설계 팹리스 업체가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세계 자동차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자동차용 반도체 국제표준 제정에 우리 업체가 소외된 것이다. 자동차용 반도체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지침은 자동차가 점차 전자화함에 따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반도체 설계 분야가 새로 추가됐다. 갈수록 빨라지는 자동차 전자화를 감안하면 이번 국제표준은 의미가 크다. 이런 대열에 우리 업체가 비켜나 있어 우려스럽다. 국제 표준은 달리 말하면 `국제 규제`이고 `기술 장벽`이다. 한 번 정해지면 좀처럼 바꾸기도 어렵다. 적용 범위가 글로벌 시장이어서 업체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다. 각 나라와 업체가 세계 표준 선점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국제표준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에 따라 기업과 국가 경쟁력이 달려 있다는 것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 지침이 마련되는 지난 몇 년 동안 국내 주요 반도체 업체는 옵서버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반면에 인텔, 퀄컴, 엔비디아,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같은 미국 반도체 업체와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적극 대응해 우리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반도체는 일반 부품보다 설계 및 생산 과정이 복잡하다. 그래서 이번 반도체 설계 표준도 강제 사항이 아닌 지침 형태로 표준에 포함됐다고 한다.
수요 업체는 앞으로 이 지침 준수 여부를 요구할 가능성이 짙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독일 아우디에 엑시노스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공급하기로 했지만 이 표준에 대응하지 못하면 추가 수주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지침은 내년 1월 정식 발효된다. 국제 표준 특성상 대응하기에 촉박한 시간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민·관이 머리를 맞대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