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기업이 중국 현지 시설 투자를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한반도 배치 공방으로 중국 비즈니스 불확실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중국이 무역보복 조치 수위를 높일 것으로 예고하는 등 `차이나 리스크`가 점점 커지면서 투자 계획을 재조정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올해 예고한 투자 계획을 보류할 경우 중국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놓였다.
8일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이 감정 대응을 계속하고 있어 투자 심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면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상황이 지나간 뒤에야 세부 투자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는 올해 중국에 굵직굵직한 투자를 추진해 왔다.
삼성전자는 올해 중국 시안에 2기 3D 낸드플래시 신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오너 구속 여파에 사드 문제까지 겹치면서 세부 실행 방안을 세우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내 반중 감정이 고조되면 `신공장 건설안` 자체에 나쁜 여론이 몰려들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10년 만에 중국 우시 공장 증설에 나섰지만 사드 후폭풍이 어느 방향으로 불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배터리 산업 분야에선 이미 투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중국 시장 공략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난해 현지에 배터리 셀 제조 공장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전이 없는 상태다. 회사는 지난해 8월 베이징자동차, 베이징전공과 중국 내 배터리 셀 제조 공장 설립 계약을 맺고 현지 양산 체제를 갖출 계획이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 해외 배터리기업 규제 강화에 이어 사드 사태까지 겹치면서 셀 공장 설립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전해졌다.
SK의 중국 석유화학업체 상하이세코 지분 50% 인수도 난항에 빠졌다. 수월할 것 같던 인수 작업이 사드 논란과 함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LG화학, 삼성SDI도 배터리 관련 중국 규제 강화로 현재 투자나 사업이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디스플레이 산업에선 LG디스플레이가 광저우 대형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경기도 파주 생산 라인을 대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라인으로 전환하면서 줄어든 물량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LG디스플레이는 투자 그 자체보단 반한 감정이 고조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부품업계 투자가 지연되면 한국 기업은 물론 중국 경제도 타격이 예상된다.
재계 관계자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은 다양한 소재·부품 협력사의 동반 투자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대규모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면서 “꼭 필요한 투자가 정치 이슈로 표류하면 양국 모두 경제 피해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부품업계는 사드로 인한 중국의 무역보복 조치가 부품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완제품 기업이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패널을 쓰지 못하면 완성품을 제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호 전기전력 전문기자 snoop@etnews.com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