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수준의 의료 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의 만남. 우리나라 의료정보 산업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거론된다.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우리나라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두 가지다.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짧은 시간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암, 간이식, 건강 검진 등 일부 영역은 선진국을 앞지른다. 대부분 대형 병원 이야기다. 우리나라 전체 진료비 가운데 10여개 상급종합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15%가 넘는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기형적 구조다.
대형 병원은 환자 혹은 정부가 지불하는 의료비 수익이 절대적이다. 주차장, 장례식장, 병원 내 부대시설 등 수익도 일부 있다. 환자 수를 늘려야 한다. 정부에 청구하는 수가를 제대로 받는 것도 최우선이다.
ICT의 가장 큰 매력은 '효율성'이다. 한정된 자원으로 비용은 줄이고 업무 생산성을 높인다. 병원은 이마저도 안 통한다. 최선의 의료 서비스는 원하는 의사를 빨리 만나게 해 주는 것이다. 의사에게 ICT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은 업무를 추가하는 꼴이다. 사실상 환자 '머릿수 경쟁' 체제에서 ICT 투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나라 대형 병원 가운데 전체 예산의 10%를 ICT에 투자하는 곳도 한두 군데에 불과하다.
세계 수준의 ICT도 의료정보 산업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지나치게 '기술' 중심적인 시장 구조 탓이다. 기술 우위만 강조하다보니 직관적 의료시장과는 상극이다.
지난달 미국 올랜도에서 열린 세계 최대 의료정보학회인 '북미의료정보·관리시스템학회(HIMSS)'만 봐도 그렇다. 5000개가 넘는 기업이 빅데이터, 클라우드, 인공지능(AI) 등 첨단 ICT 기반의 솔루션을 전시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비용 절감, 경영 지원, 환자 모니터링 등 담백한 메시지다. 빅데이터, AI라는 단어는 나오지도 않는다. 기술이 아닌 구현 가능한 서비스와 가치가 핵심이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우리나라의 나열식 기술 전시회와는 대조적이다.
보건 산업의 경쟁력은 의료 정보에서 나온다. 주춧돌인 의료 서비스와 ICT 역량을 되짚어야 한다. 모순된 산업 구조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의료 정보 산업은 '만년 유망주'에 그칠 수 있다.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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