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래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강의교수
3월, 아직도 산과 들은 고단한 겨울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지만, 봄소식을 들고 불쑥불쑥 먼저 나타나는 전령들이 있다. 요정 같은 꽃들이 있다.
정원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봄의 요정은 복수초꽃이다. 눈이 채 녹기도 전에, 혹은 땅의 얼음이 미처 풀리기도 전에 설마 하는 곳에서 노랗고 소복한 꽃송이를 슬며시 빼꼼하게 내민다. 마치 까맣게 잊었던 지난날의 약속을 보채기라도 하듯이, 봄이 정말 올까하고 걱정하는 서민들의 아픔을 다독거리기라도 하듯이 거짓말처럼 마른낙엽 사이로 꽃등을 켜든다. 그래서 복수초는 설련화, 얼음새꽃, 원일초 라고도 하나보다. 미나리아재비목과에 속하는 복수초는 2월 말경부터 활엽수 아래 평평한 터를 잡고 첫 개화를 알린다. 복수초꽃은 낮엔 활짝 웃으며 피었다가, 밤엔 눈을 꼭 감고 잠들었다가를 반복하며 거의 한 달 이상 봄을 알리는 신호등 역할을 한다. 그래서 복복(福)자 목숨수(壽)자 복수초란 이름이 하나 더 붙었나 보다. 그래서 복수초꽃의 꽃말은 ‘영원한 행복’ 또는 ‘슬픈 추억’이라고 하던가.
복수초꽃과 숨바꼭질을 하는 사이 드디어 주변 모든 나무들도 얼굴에 생기가 돌며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산수유가 잎이 눈을 뜨기도 전에 노란 불꽃놀이를 시작한다. 대개 동구 밖 묘둥지 부근이나 봇도랑 옆, 시골집의 뒤란에 제멋대로 늘어서 울타리나 경계를 자처하는 산수유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반가운 손님처럼 어느 날 갑자기 노란 꽃들이 피어난다, 산수유 꽃은 모든 식생들의 봄기운을 응원하듯이 본격적인 봄맞이를 자처하는 듯하다. 꽃샘추위나 춘설에도 아랑곳없이 벌과 나비를 부르며 노오란 그 기세를 떨친다. 복수초의 무심한 작은 불꽃이 산수유 꽃으로 옮겨 붙어 산천에 봄을 알릴 때쯤, 남쪽의 청매·홍매 꽃소식이 다투어 빠르게 올라오고, 노란 개나리꽃도 깜짝 놀라 제풀에 만개하고 만다. 들에는 냉이꽃, 민들레꽃, 제비꽃, 양지꽃, 큰개불알풀꽃 등이 다투어 피기 시작하고, 하늘에는 큰키나무 목련, 벚나무가 화려한 꽃들을 천국처럼 드리운다. 곧, 온 천지가 봄꽃으로 물들어 버리고, 주변은 각종 봄꽃 축제 소식으로 넘쳐난다.
사람들의 봄은 활짝 열인 거리의 쇼우 윈도우와 쇼핑몰에서 시작된다. 봄맞이 대 바겐세일은 이월상품을 밀어내고, 한해 유행에 맞춰 겨우내 고민한 신상품들이 맞선을 보는 기간이다. 해를 넘어 이월된 상품은 자유 판매대나 대형쇼핑몰 입구 등에서 미끼상품으로 원가나 대폭 세일로 내방객을 유혹하고, 반짝거리는 신상들은 비싸지만 색다른 디자인과 화려한 색상으로 소비자들을 망설임에 빠지게 한다. 봄 세일결과는 한해의 경기를 점치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하고, 경기침체냐 활성화냐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사실상 국내 마켓은 3월에서 6월 사이 마케팅 시즌기의 성과가 많은 상품군에 있어서 그 해 매출을 전망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올해 시장에서의 봄은 아직 꽃이 필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도 자영업이건, 재래시장이건, 백화점이건, 양판점이건 매기가 예년 같지 않다고 한다. 심지어 자주 다니던 단골 음식점들도 어느 날 가면 폐업하고 문을 닫곤 한다. 봄은 봄인데 진정한 봄이 아직 오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우리 모두 다른 무엇인가에 홀려 아직 미몽의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 봄이 노란 꽃들로 열리는 것은 노란 색의 확장성, 빠른 전이, 당당함과 밝음, 인내와 끈기 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빛과 같은 섬광이 어둠과 움츠림에 잠겨있던 모든 생명들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내내 국가적인 위기와 혼란을 이겨내고, 냉혹한 거리에서 정의와 법치를 다시 세운 것도 스무 번이나 이른 봄꽃처럼 피어난 노란 촛불이었다. 봄을 여는 꽃처럼 평범한 일상을 깨우고, 먼 들꽃처럼 번지고, 함께 격려하며 꽃을 피웠기 때문일 것이다.
벌써 봄을 여는 노란 꽃들은 또 한해 생명의 문을 열고, 산천에 활기를 주며, 한해 멋진 여정을 시작하라는 신호탄을 쏘아대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새로운 대한민국 봄을 여는 강한 꽃이었는지 모른다. 아니, 진정 새 봄을 여는 꽃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