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14>사랑합니다, 고객님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14>사랑합니다, 고객님

“고갱니임~, 사랑합니다. 개인정보 공유에 동의하셨죠. 저는 ○○대출회사 김△△입니다. 어쩌고저쩌고.”

'고갱니임~'으로 시작할 때부터 감(感)이 온다. 일면식도 없는 작자의 사랑 고백이란 것을. 상냥하기도 하다. 게다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나는 그를 모른다.

원무과 정 대리가 분이 안 풀린 듯 씩씩거린다.

“아니, 우리도 감정노동자잖아요. 그래서 하루에 매일 수천통씩 대출 권유 전화를 돌리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싶어서 한번 끝까지 들어 주려 했죠.”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14>사랑합니다, 고객님

정 대리의 분통 터지는 이야기. 시작은 이렇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상대방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됐어요!” 하며 전화를 끊는 사람을 대할 때 저들의 심정은 어떨까 싶었다. 그날따라 마음먹고 영업성 권유 전화를 상냥하게 받아줬다. 듣다 보니 20분이나 흘렀다. 이젠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잘 들었습니다만 저는 대출이 필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갑자기 상대방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아니, 대출이 필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며 화를 냈다. 정 대리는 상대방이 화를 내자 당황했다. “저는 돈이 별로 필요하지 않아서요”라고 말끝을 흐렸다. 저쪽에서 더 큰소리로 따졌다. “돈이 왜 필요 없는데요?”

아차 싶어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으려는데 전화기 저 너머에서 “야, 너 끊지 말고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보라”는 절규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정 대리는 전화를 끊었다. 옆의 남자 동료가 무슨 일인지 물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남자 동료 대답이 가관이다.

“정 대리가 완전히 잘못했네. 왜 약을 올려. 처음부터 전화를 받아 주지 말든가. 한참을 듣다가 '돈이 필요 없으니 이만 끊을게요' 하면 누군들 약이 안 오르겠어? 그리고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정 대리는 끝내 울었다. “친절하게 받아 준 내가 왜 잘못했냐고, 억울하다고요!”

따져 보자. 정 대리는 '같은 입장'을 배려했지 영업 내용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친절하게 받아 주고 적당히 끊는 배려는 1분 이내면 충분하다. 20분이 넘도록 전화 응대를 했다면 상대방 입장에선 영업이 '먹혔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 대리가 짧게 응대해 주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면 그 시간에 다른 고객을 유치했을 수도 있다. 하루 수백통의 전화로 몇 명의 고객을 확보하는 게 콜센터 사람들이다. “죄송합니다”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일찍 끊었다고 해서 상대방이 상처 받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고객의 거절과 냉정함에 단련돼 있을 테니까.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냉정한 대답이 요구될 때가 있다. 모호한 반응이나 불분명한 태도, 기대치를 남긴다든지 하는 것은 친절도 배려도 아니다. 지나친 공명심과 상대방을 착각하도록 만드는 말은 진정으로 독이 된다. 듣고 싶은 내용이 아니면 처음부터 'No'라 대답하자. 헷갈리지 않도록.

정 대리가 억울해 한 건 콜센터 직원의 악다구니가 아니었다. 자신 입장을 공감해 주지 않고 비난한 남자 동료가 문제였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얄미웠다. 동료의 빈정거림은 옳지 않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듣는 이의 태도다. 화자(話者)의 감정이 격해 있을 때 조용히 듣는 몸짓이야말로 바람직한 소통 방법이다. 감정을 보듬는 첫 번째 단계는 '듣는 것'이다. 논리적 접근은 상대방의 감정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해도 된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