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협상은 장비교체 절차?···국산장비에서 설 자리 좁아진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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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협상 과정에서 입찰에 쓰인 국산 장비를 외산으로 교체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관련 업계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협상'을 거쳐 최선의 방안으로 조정한다는 게 발주처 입장이지만, 입찰 참여를 위해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 중소기업은 막심한 피해를 호소한다.

17일 통신업계에 따르면 70억원 규모 경찰청 '디지털포렌식 전용회선 등 구축' 사업에서 경찰청이 우선협상대상자(KT-SK브로드밴드 컨소시엄)가 제안한 통합보안장비(UTM) 교체를 요구해 논란이다.

우선협상대상자가 제안한 장비는 국산 제품으로, 조달 입찰을 통해 정식 평가를 받았지만 경찰청은 우선협상 과정에서 외산 장비로 교체를 요구했다. 우선협상대상자는 발주처 요구를 수용, 별도 외산 장비를 선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청 관계자는 “해당 사업은 장비가 아닌 망 사업으로 철저한 보안과 성능이 요구되는 포렌식 회선을 구축하는 일이라 세계적으로 검증된 제품이 필요하다”면서 “예산을 늘리지 않고 보다 좋은 장비를 도입할 수 있는 데, 공무원이 이를 방관한다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우선협상 대상자에 장비를 제안한 중소기업은 제품이 국정원 보안등급을 준수, 다수 공공기관에 적용 중인 제품이라 성능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경찰청이 뚜렷한 명분 없이 입찰 공고 이전부터 제안사에 특정 외산 제품을 요청했다며 공정성 문제를 제기했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협상 과정에서 장비를 교체할 수는 있지만, 입찰공고 이전에 외산제품 도입 사유와 내용을 제안요청서(RFP)에 명시해야 했다”면서 “중소기업은 불필요한 입찰 참여와 비용 낭비로 타격이 막대하다”고 하소연했다.

〈뉴스의 눈〉

지난해 경기도 정보통신망 인프라 구축, 경기도일자리재단 전화통신시스템 구축 사업을 비롯해 우선협상 과정에서 국산 장비가 외산 장비로 교체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과거엔 RFP에 특정 외산 제품만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소조항'을 담는 일이 잦았다. 중소기업이 반발하고 언론 비판이 이어지자 독소조항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우선협상 과정에서 장비 변경 사례가 늘고 있다. 협상에 따라 일부 내용 조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통신사 등 주사업자는 국산 제품을 선택,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이후 최종 계약을 외산 제품으로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법적 하자는 없다. 전체 사업비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동일한 전체 사업비에 고가 외산 장비를 공급해야 하는 통신사는 수익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사업 준비에 인력과 비용을 투입한 중소 장비업체 피해는 막대하다.

장비 업체 관계자는 “발주처가 처음부터 기존 장비와 호환성 등 외산 장비를 채택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했지만 “명확한 이유 없이 장비 교체를 요구하는 것은 법적 문제가 없더라도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우선협상 과정에서 국산 장비를 외산 장비로 교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불가피하게 장비를 교체해야 한다면 국산 장비업체가 입찰 준비에 투자한 비용과 시간, 노력에 대한 보상을 강구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우선협상 과정에서 장비를 교체하기 위해선 명확한 이유를 반드시 공개해야 하는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안호천 통신방송 전문기자 hca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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