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 & Future]<18>한국의 새로운 '제3의 길'

문재인 대통령이 펼칠 경제 정책을 파악할 급소는 헌법 제119조에 있다. 2개 항으로 된 헌법 제119조는 자유시장주의와 경제민주화를 뚜렷이 적시하고 있다. 특히 경제민주화에는 균형 성장과 안정, 적정한 소득 분배, 경제력 남용 방지, 규제와 조정 등이 담겼다.

이번 대통령 선거로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등 19년 동안 좌우로 이동한 정치 시계추가 다시 진보 쪽으로 넘어왔다. 그동안 빼앗긴(?) 어젠다도 따라올 것이다. 진보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녹색과 민주화에 경제를 입혀서 '녹색 성장'과 '경제민주화'로 어젠다화한 게 이명박·박근혜 정권이다. 그러나 지금 녹색 성장은 거의 쪼그라들었고, 경제민주화는 유명무실해졌다.

새 정권이 녹색 정책을 살리고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추진하려는 것은 마치 잃은 아들을 찾아서 새 옷을 입히는 모양새다.

다만 녹색 정책만 하더라도 원자력·화력·신재생 에너지 등 국가 에너지 전략, 수자원·대기오염 등 환경 대책, 지구온난화 관련 국제 협력 등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은 과제다. 경제민주화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동반 성장, 경제·사회 격차 해소, 노사 관계 등 난제가 수두룩하다. 지난 정권 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이 '국가일자리위원회'(위원장 대통령)를 최상위 과제 해결 기구로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많은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타깃을 하나로 집약해 성공률을 극대화하면서 나머지 복잡한 과제들을 침착하게 풀어 가는 '일점 돌파형 방식'이다. 자연히 내각에서 처리해야 할 과제가 크게 늘 것이다. 청와대는 작지만 알차고, 각 부처 장관은 할 일이 많아진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헌법 제119조는 청와대와 내각을 결속시키는 정책 규범으로 계속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성공하는 정부로 가는 길이다. 역사를 만들려면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보다 앞서 치른 프랑스 대선에서 좋은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에마뉘엘 마크롱은 정당도 없는 풀뿌리 집단으로 좌파·우파의 기존 정당을 깨고 극우를 저지했다. 그의 승리는 구태의연한 후보도, 과격한 후보도 피하고 싶은 유권자의 소거법(消去法)적 선택이다. 반 글로벌, 대중 영합, 자국 우선이라는 단어가 만연하는 국제 정치 가운데에서 친기업(프로 비즈니스), 구조 개혁, 글로벌 주의를 내건 후보의 당선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는 유연한 노동 시장, 건전한 재정, 고용 창출에 유효한 세제 등 힘든 개혁의 필요성을 명확히 파악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이해시켰다. 우파도 아닌 '베스트 중도 노선'이 그의 지향점이다.

유럽에서는 이를 두고 새로운 '제3의 길'이라고 평가한다. 원래 제3의 길은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1998년에 출판한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 전 해에 새로운 노동당 '뉴 레이버'를 내걸고 총리에 오른 토니 블레어가 제3의 길을 정책 이념으로 채용하면서 유명해졌다. 한마디로 평등과 약자 보호 등에 대한 정부 책임을 강조하는 한편 글로벌화와 세계의 다원주의도 중시하는 자세다. 오늘날 영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와는 정반대 자세다.

마크롱은 블레어와 꼭 같이 정부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으로 잡았고, 유럽연합(EU) 개방을 주장했다. 프랑스의 '제3의 길'인 셈이다. 블레어 취임 이듬해에 독일 총리가 된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블레어와 같은 중도좌파로, 동·서독 통일 후의 경제·고용 부진이 개선되지 않자 인기 없는 실업수당 삭감과 의료 부담 증대를 담은 '어젠다 2010'을 선언했다. 기업 경쟁력 개선으로 실업이 줄고 지지 확대의 과실을 맛본 것은 그의 뒤를 이은 메르켈 총리였다. 제3의 길은 엄중한 반발과 지지율 저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가의 단호한 결단이 요구된다.

21세기의 새로운 사회 모델은 저탄소 산업 사회, 4차 산업혁명이 이끄는 디지털 사회다. 이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서로 어긋나 있는 자유시장주의와 복지국가주의의 결합이 요구된다. 이 결합은 사회 통합을 희생시켜 온 신자유주의(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됨)와 결별하는 동시에 효율을 희생시켜 온 종래의 사회민주주의(완전한 복지국가지향)를 근본부터 개혁하는 것이다. 유럽은 지금 마크롱을 통해 새로운 제3의 길과 유럽의 미래를 점치고 있다.

우리는 헌법 제119조에서 새로운 한국형 제3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기든스가 말하는 시장주의 개혁과 복지 개혁을 동시에 추진하는 길이다.

곽재원 서울대 공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