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기 웹툰 '미생(未生)'의 윤태호 작가. 그는 좌우명이 없다. 자신을 어떤 틀에 가두는 게 싫어서다. 그렇다고 막 사는 인생이 아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산다. 취미도 없다. 작품 외에 다른 데 눈을 돌린 적이 없다. 작업이 끝나면 소수의 벗과 만나 맥주잔을 기울이는 게 큰 즐거움이다.
비정규직의 가슴 저린 애환을 그린 '미생'으로 국민 작가 반열에 오른 작가 윤태호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강남구 누룩미디어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야구 모자에 둥근 안경테, 희끗희끗한 턱수염으로 나타났다.
-건강은 괜찮나.
▲아직 완쾌가 안됐다. 치료하고 있다. 어깨와 팔꿈치 연골이 상했다고 한다. 의사는 푹 쉬라고 하는데 쉴 형편이 아니다.
그는 '미생' 이후 건강이 나빠져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지금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턱수염을 기른 게 만든 캐릭터인가.
▲아니다. 탈모 현상이 있어서 모자를 착용했다. 턱수염을 한 번 길렀더니 주위에서 보기 좋다고 해 기른 것이다.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니다.
![[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99>“인생에 완생은 없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https://img.etnews.com/photonews/1706/960938_20170608165051_191_0007.jpg)
-일은 많은가.
▲'미생' 시즌2를 주 1회 연재한다. 최근 출판사 위즈덤하우스가 서비스를 시작한 웹툰과 웹소설 전문 플랫폼 저스툰에 주 1회 '오리진(Origin)'을 연재한다. 누룩미디어 사무실에 주 1회, 만화가협회에 주 1회, 경기도 성남시 분당과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있는 작업실에도 하루씩 나간다.
'오리진'은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소재로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전 연령대가 볼 수 있는 100권 분량의 교양만화 시리즈라고 한다.
-'미생' 시즌2는 언제 드라마로 제작하는가.
▲현재 연재하는 '미생' 시즌2가 끝나야 한다. 이미 tvN과 드라마 제작 계약을 한 상태다. '미생' 출연진이 그대로 시즌2에 출연할 지는 제작사가 결정할 문제여서 잘 모른다.
-장그래라는 작명은 어떻게 했는가.
▲'미생'은 비정규직의 아픔을 재현한 작품이다. '미생'은 밝은 만화가 아니다. 내 작품은 어둡다. 당초 주인공은 실패하고 난관에 부닥쳐도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긍정 인물을 그리려고 했다. 처음 이름은 장생이었다. 주위에서 이름이 너무 바둑 같다는 지적을 받았다. 어느 날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그래'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래'는 예스(yes)라는 긍정을 뜻하는 말이다. 장생의 '장'과 '그래'를 합쳐 장그래로 작명했다.
![[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99>“인생에 완생은 없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https://img.etnews.com/photonews/1706/960938_20170608165051_191_0003.jpg)
-'미생' 시즌2에서는 미생이 완생(完生) 되는가.
▲인생에서 완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완생은 사람마다 도전하고 추구하는 지향점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되거나 취업생이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해서 완생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완생 기준이 다르다. 인생이라는 바둑판에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미생'은 어떻게 구상했는가.
▲'미생'은 출판사에서 제안한 작품이다. 허영만 선생의 관상만화 '꼴'과 같은 성공과 지혜를 다른 처세술 만화를 그려 보자는 제안이었다. 당시 제목은 '고수'였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내가 처세술에 관해 말할 게 있을까 해서였다. 바둑의 기본은 싸움이다. 처세라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술수나 책략 같은 의미의 술(術)이란 말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계약을 한 상태여서 계약서대로만 할 생각이었다. 후회도 했다. 다음부터 계약할 때는 신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웃음) 그게 대박을 터뜨렸다. 새삼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99>“인생에 완생은 없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https://img.etnews.com/photonews/1706/960938_20170608165051_191_0002.jpg)
-만화 소재는 어떻게 정했나.
▲가정에서 못하는 이야기를 터놓고 하는 직장인의 애환을 묘사하고자 했다. 회사 사무실에 설치한 파티션 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소재 찾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직장인 가운데 일하기 싫어서 회사나 직장 상사를 욕하는 이는 없다. 꿈이 좌절되거나 직장 분위기가 나쁠 때 화를 내고 불평을 말하기 마련이다.
-취재는 어떻게 했는가.
▲직장인이 많이 찾는 지역 감자탕 같은 음식점에 가서 취재를 했다. 그곳에서 회사나 상사에 대한 직장인들의 불만을 들었다. 그런데 취재에는 별 도움이 안됐다. 소음이 심해서 소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기가 어려웠다. 몇 번 갔다가 포기했다. 한국기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종합상사 7곳에 취재 협조를 했는데 응해 주지 않았다. 취재를 위해 인터넷에 들어가서 직장인 사이트에 가입했다. 취업준비생 사이트에도 들어가서 그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7회쯤 지나자 실제 대기업 종합상사에 다니는 두 사람을 알게 돼 그들의 도움으로 그때부터 제대로 취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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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는 순조로웠는가.
▲나는 직장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회사 조직이나 구성원 역할에 대해 전혀 몰랐다. 나는 직장에서 과장이 높은 자리인 줄 알았다.(웃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먼저 조직도와 직급, 업무 권한, 직급별 연봉, 승진 기간 같은 내용을 파악했다. 그때 직장에 '자기 평가서'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 제도는 자기 양심을 가혹하게 시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역 용어를 몰라 도움을 준 분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처음에는 무역 용어를 풀었고, 그다음에는 이를 축약했다. 이를 가지고 2회분 작품을 구성했다. 대기업도 그때 구경했다. 작품에 대해 댓글이 많아 달렸다. 그 가운데에는 “직장인은 돈을 보고 회사에 일하러 가는 노예지 누가 자아를 실현하러 가느냐”는 댓글이 달렸다. 몇 회 지난 후 “회사에 자아를 실현하러 가지는 않지만 자아가 배신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그것이 곧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극 중 대사를 넣었다. 직장인들이 지나친 자신 혐오나 비하하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대학 강의는 안 하나.
▲세종대에서 대우교수로 강의를 하다가 2015년 말에 그만뒀다. 비싼 등록금 내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나도 모르게 '이랬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강의했다. 내가 안 해 본 일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했다. 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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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만화가가 인기 직종이다. 인력 양성은.
▲나도 문하생이 4명이다. 모두 만화학과 졸업생이다. 현재 만화아카데미 설립을 구상하고 있다. 창작가는 자기 속을 풀어내는 직업군이다. 내면(內面)에서 하고 싶은 말이 나와야 한다. 창작자에게 걸맞은 교양과 역사 교육에 집중할 생각이다. 내년 초 개설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작가로 남고 싶은가.
▲같은 연층의 독자와 동행하는 작가다. 나이가 들면 실버 만화를 그릴 생각이다. 고료와 무관하게 나이에 맞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10대 만화를 내가 그린다면 얼마나 난센스인가.
-만화가의 주요 자질은.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강렬해야 한다. 이제 그림만 잘 그리는 건 자질이 아니다. 만화가 가운데 그림 못 그리는 사람은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성실성이다. 성실성을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돈 많이 벌고 인기 얻고자 만화가를 선택한다면 큰 잘못이다. 돈 벌고 인기 얻는 것은 성실의 대가고 우연이다. '미생'도 그렇다.
-국내 만화가는 몇 명이나 되는가.
▲협회 등록 만화가는 1000여명이다. 포털 작가까지 합하면 2000여명이다.
-불공정 거래는 사라졌는가.
▲주로 권리권과 사후권이 분쟁의 발단이다. 요즘은 협회에서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분쟁의 소지를 줄였다. 지난날과 같은 그런 불공정 거래는 없다.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대국은 봤는가.
▲4국 가운데 3국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한 번 이기고 세 번 졌는데 고뇌하는 과정이 멋있어 보였다. 이세돌 9단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바둑 실력은.
▲10급이다.
![[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99>“인생에 완생은 없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https://img.etnews.com/photonews/1706/960938_20170608165051_191_0004.jpg)
-바라는 점은.
▲정치 관계로, 정치성을 이유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 같은 일은 앞으로 없어야 한다. 예술인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고 불이익 받는 일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차기 작품 구상은.
▲지금 작품이 장편이다. 빨라도 2년 후에나 새 작품 구상이 가능하다.
-좌우명과 취미는.
▲없다. 나를 어떤 틀에 가두는 게 싫다. 아이들한테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는다. 취미라고 할 게 없다. 만화를 그리다가 시간이 나면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맥주 한잔 하는 게 즐거움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온 그가 계속 서 있었다. “어디 가세요.” “아닙니다. 가신 뒤에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 피우려고요.” 우리는 너털웃음으로 헤어졌다.
윤태호 작가는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많이 그렸다. 허영만 작가 문하생으로, '미생'을 비롯해 '인천상륙작전' '내부자들' '파인' '이끼' 등 작품이 30여종에 이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나무운동 홍보대사와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대우교수를 역임했으며, 올해 한국만화가협회장에 선임됐다. 2010년과 2012년 만화 부문 대통령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