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할 줄 알았다. 아니 담담했다. 아버지의 눈물을 보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전립샘암 말기 상태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의사는 약물 치료로 잘하면 5년, 10년까지 살 수 있다고 했다. 희망을 가지고 약을 복용했다. 3개월 만에 응급실로 실려 갔을 때는 이미 골수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아버지는 엄하고 권위 강한 존재였다. 따스한 말 한마디나 사랑의 제스처 따윈 모르는 양반이었다. 여고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나는 놀라운 장면을 마주했다. 친구가 자기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아버지와 딸이 저럴 수 있다니.
내 아버지는 늘 야단쳤다. 옷매무새를 반드시 하라, 밥 먹을 때 소리 내지 마라, 다리는 오므리고 앉아라, 일찍 들어와라, 짧은 치마 입지 마라, 화장하지 마라…. 문장 첫마디는 '어디 여자가'로 시작했다. 언행은 물론 자녀의 욕망까지 관리하셨다.
맏언니가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밤 10시를 넘겨 12시가 다될 때 들어왔다. 아버지는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니의 긴 머리채를 한 무더기 움켜잡고서 가위로 싹둑 잘랐다.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여자의 자존심이란 걸 아셨다. 언니는 한나절을 통곡했다. 그러곤 뭉개진 자존심을 이튿날 민머리로 저항했다.
언니보다 먼저 아버지께 저항한 사람은 나였다. 고등학생 때 제사상에 잘못 놓인 제사 음식으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심하게 야단쳤다. 크게 잘못한 일도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말 한마디 못하고 주눅 든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왜 그러세요? 어머니가 뭘 잘못했다고 큰소리치세요?”
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분에 떨었다. 당신께 대든 나를 '패륜아'라 했다.
부모님의 불화는 늘 아버지 동생들이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가족보다 당신의 동생을 더 아꼈다. 제사상에 제사 음식이 잘못 올라간 것을 지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누이동생, 내 고모였다. 아버지는 증조모 손에 컸다. 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 고문 후유증으로, 조모는 고문 후유증과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세상에 오롯이 남은 동생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를 알 나이가 아니었다.
모정(母情)만 기억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헌신한 것도 희생한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권위로 무장하고 질타에 익숙한 아버지에게 부정(父情)이 있을까 의심한 날이 더 많았다.
내가 어리석었다. 아버지는 해 준 게 많았다. 대학까지 가르쳤고, 결혼도 시켰다. 아버지는 따스하게 타이르거나 좋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어허, 어디 여자가' 하며 단속하신 덕분에 밥 먹을 때 소리 내지 않고, 단정한 옷매무새로, '여자답게' 자랐다. 불편한 절제가 인생의 안전장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늦은 나이에 알았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시절에는.
아버지는 병실에서 우리 남매를 마주할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암세포가 아니라 이제 세상과 이별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 내가 사는 동안 가장 긴 인연이 되어 준 존재와 헤어짐을 준비한다. 그도 나도 이별이 두렵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어색해서, 민망해서 못하셨다. 나도 그에게 고백하지 못한 말이 있다. “아버지, 사랑해요.”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