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시바가 반도체 자회사인 도시바메모리의 인수 우선 협상 대상자로 한·미·일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이 컨소시엄에는 SK하이닉스를 포함한 미국 베인캐피털, 일본 관·민 펀드인 일본산업혁신기구(INCJ), 일본 정책투자은행 등이 참여한다. 이들은 특수목적법인(SPC)를 세워서 도시바메모리 지분 100%를 인수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SPC에 약 3조원을 대출 형태로 투입할 것으로 관측된다. 지분율로 계산하면 15% 수준이 될 것으로 업계에선 보고 있다.
비록 재무 투자자로 참여하고 경영권 역시 일본에서 가져가게 될 전망이지만 이번 딜이 성사되면 SK하이닉스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원천 기술을 보유한 도시바메모리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면서 앞으로 다양한 협력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선 양사 간 협력이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첫째 차세대 기술 공동 개발이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도시바와 협력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 대표 품목이 차세대 메모리다. 양사는 2011년부터 STT-M램 상용화를 위해 공동 연구개발(R&D)을 수행해 왔다. 2015년부터는 차세대 리소그래피 기술인 나노임프린트(Nano Imprint) 공정을 함께 개발하고 있다. 나노임프린트는 나노 패턴이 각인된 스탬프를 사용, 마치 도장 찍듯 기판 상에 나노 패턴을 전사하는 공정 방식이다. 기존의 노광 공정보다 생산 원가가 싸다. 양사가 이 같은 공동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면 국내 장비, 소재 업체가 수혜를 볼 가능성이 짙다. 대체로 공동 개발 기술은 양사 간 장비와 재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신규 기술 개발 과정에 참여한다면 추후 상용화 시기에 공급 업체로 선정될 공산이 크다.
둘째 특허 공유다. 도시바는 낸드플래시 기술을 처음 개발한 회사다. 원천 특허를 포함, 다양한 기술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미 SK하이닉스는 지난 2007년 낸드플래시 관련 상호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바 있다. 불필요한 특허 분쟁 소지도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도시바는 지난 2014년 3월 SK하이닉스를 상대로 특허침해 금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그해 12월 합의 끝에 소송을 취하했다. 양사가 재무 관계로 피를 섞게 되면 이런 류의 소모성 분쟁은 없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셋째 생산 공장의 공동 운영이다. 근시일 내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생산 기술을 공동 연구하고 교류를 넓히다 보면 장기로는 이 같은 협력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관측된다. 도시바는 기술은 있지만 자금 동원력이 떨어진다. 웨스턴디지털과의 합작으로 생산 공장을 공동 운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자금 동원력이 좋고 기술력 또한 높기 때문에 웨스턴디지털보다 나은 공장 합작사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매입했을 때 시너지가 나거나 남이 샀을 때 피해를 보는 기업이라면 무조건 인수전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 SK의 인수합병(M&A) 원칙”이라면서 “이번 딜이 성사되면 원론상의 협력 시너지 외에도 중화권으로 도시바가 통째로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 SK머티리얼즈, LG실트론 등 SK그룹이 그동안 추진한 반도체 분야의 M&A는 성공작”이라면서 “이런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번 딜이 성공한다면 가입 가치가 크게 올라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SK하이닉스는 이날 우선협상대상자 선정과 관련한 별도 입장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아직 인수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황인데다 직접 출자 주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바 공식 발표 자료에도 베인캐피털, INCJ, 일본정책투자은행 외 SK하이닉스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공식 입장을 발표해 '해외 기술 유출'에 민감한 일본 여론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만 홍하이는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 우려로 가장 높은 금액을 써내고도 협상 대상자가 되지 못했다.
SK그룹 수뇌부도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최태원 SK회장,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과 함께 도시바 인수 전략을 세운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신문 매체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일본을 자극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면서 “마치 (도시바를) 점령한다, 이런 톤보다는 잘 돼서 상호 윈윈하는 쪽으로 해주는 것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