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과 데이터센터 등 수요 증가에 힘입어 반도체 시장이 활황을 맞았다. 과감한 투자와 기술 개발로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국제 경쟁력을 확보한 우리나라 기업들은 '슈퍼 호황'이라고 불릴 정도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반도체 기술 경쟁력의 근간에는 흔히 '무어의 법칙'으로 불리는 미세화 기술이 있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 공동 창업자 고든 무어가 1965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반도체 집적회로(IC)의 집적도가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소자가 미세화 되면 단위 면적당 더 많은 반도체 칩을 제조할 수 있어 원가 경쟁력이 높아진다. 동시에 소비 전력이 낮아지고 성능도 향상된다. 이러한 미세화 덕분에 우리가 수십 기가바이트 저장 용량의 스마트폰을 지금과 같은 가격으로 사용하고, 고해상도 영화도 끊어짐 없이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10나노미터(㎚) 미세화 기술이 적용된 반도체 제품까지 등장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0.1마이크로미터(㎛), 즉 100㎚ 이하는 미세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10㎚ 이하로 미세화가 가능한 바탕에는 바로 나노기술(NT)이 있다.
10억분의 1을 나타내는 나노(N)에 기술(T)을 더한 나노기술(NT)은 ㎚에 근접한 원자·분자 크기의 단위에서 물질을 합성하고 제어하며, 그 성질을 측정·규명하는 기술을 말한다. 에너지, 환경, 바이오, 소재 등 이미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가장 앞선 분야는 역시 반도체다.
NT가 반도체 미세화 방안으로 처음 연구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반도체 미세화의 역사는 NT와 함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차원(3D) 구조를 통해 누설 전류 문제를 해결한 핀펫(FinFET) 기술, 원자 단위의 증착을 통해 두께를 ㎚ 단위로 조절할 수 있는 원자층 증착(ALD) 기술, 마스크에 형성된 패턴을 웨이퍼에 전사시키는 나노 패터닝 기술 등 지금과 같은 미세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 기술 모두 ㎚ 수준으로 물질을 제어할 수 있는 NT 덕분에 가능했다.
이제 미세화 기술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반도체 기본 재료인 실리콘은 원자 크기 약 0.2㎚, 두께 1㎚ 이하다. 물질의 미세화 한계에 이미 근접한 상태다.
스마트폰이나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 저장장치로 주로 사용되는 낸드플래시는 셀 간 간섭 등 문제로 이미 미세화 대신 수직 방향으로 적층, 원가 절감과 대용량을 구현한다. DRAM이나 중앙처리장치(CPU), 스마트폰중앙처리장치(AP) 등 로직 반도체는 당분간 미세화가 더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기술 난도 증폭과 원가 상승에 직면해 있어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한 상황이다. 역시 'NT'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D로 게이트를 제어해 누설 전류를 줄이는 핀펫 기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노와이어를 사용한 게이트 올 어라운드(GAA) 구조, 수나노 크기 양자점(퀀텀닷)을 활용해 소비 전력을 파격으로 줄일 것으로 기대되는 단전자 트랜지스터(SET), 스스로 ㎚ 크기의 구조를 형성해 기존의 톱다운 방식 패터닝 기술을 대체 또는 보완할 것으로 기대되는 자기 조립 소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극한의 미세화를 가능케 하기 위해 연구되는 NT 기반 반도체 기술이다.
물질이 ㎚ 수준으로 작아지면 물질 고유의 특성과 전혀 다른 전기 및 광학 특성을 나타내는 점까지 고려할 때 NT의 활용도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 핵심 부품이다. 수요와 위상은 더욱 커질 것이다. 현재 경쟁력을 더욱 높이고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위상 제고를 위한 지속 투자와 연구개발(R&D)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반도체 기술 발전의 바탕이 돼 온 미세화가 물질 한계에 근접함에 따라 기술의 근간이 되는 NT와의 접목 필요성 또한 더욱 증대되고 있다.
NT 또한 우수한 인력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양성하는 학계의 역할은 필연이다. 기초 기술 특성상 학계와 연구소 중심으로 개발한 기술을 기업에서 응용하는 형태가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학계, 연구소, 기업이 중장기로 협력하고 선순환할 수 있는 생태계 활성화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NT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통해 반도체 진화와 발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홍성주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부사장) sungjoo.hong@s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