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측의 통상임금 패소 판결로 우리나라 자동차를 포함한 산업 전반에 경고등이 켜졌다. 기아차는 당장 총 1조원 안팎의 비용 부담을 떠안으면서 10년 만에 적자 기업으로 돌아서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이 여파로 재계 서열 2위 현대차그룹의 존립도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31일 판결 직후 김용근 자동차산업협회장은 “그동안 노사 합의와 사회 관례, 정부 행정 지침, 기아차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생태계에 미치는 막대한 악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라면서 “경쟁국에 비해 높은 인건비로 말미암아 경쟁력이 뒤처진 상황에서 판결에 따른 막대한 추가 임금 부담은 회사의 현재와 미래 경쟁력에 치명타로 작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자재, 부품, 물류 등으로 수직 계열화된 현대차그룹은 후폭풍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여기에 현대·기아차 부품 협력사는 물론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 들어가 있는 115개 기업의 경영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동차 산업의 악영향 확산으로 '자동차발 제2의 IMF(금융위기)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됐다.
◇기아차 10년 만에 적자 기업 전환
기아차는 조 단위의 '통상임금 폭탄'을 맞게 됐다. 1심 선고인 만큼 당장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3분기부터 수천억원의 영업 손실을 피할 수 없다. 이날 재판부가 기아차에 지급을 명한 4223억원을 고려하면 기아차의 부담 비용은 1조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당초 2011년 10월 2만7458명의 기아차 근로자들이 통상임금 소송에 청구한 2008년 8월~2011년 10월(3년) 임금 소급 청구액은 6900억원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가운데 절반 이하인 3000억여원의 소급 임금과 지연 이자를 더해 4223억원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014년 10월 근로자들(13명)이 통상임금 대표 소송을 통해 주장한 2011년 10월~2014년 10월(3년) 임금 소급액(약 1조1000억원)을 적용할 경우 퇴직금 가산액 등을 합쳐 기아차 부담액은 1조원 수준이다.
결국 조 단위의 비용 부담을 피하지 못했다. 여기에 노조가 2·3심에서도 승소할 경우 2014년 11월부터 최근까지 받지 못한 임금까지 소급해서 지급해 달라는 소송을 추가로 제기할 가능성이 짙은 상황이다.
기아차는 법원 판결 시점(3분기)부터 이 예상 비용을 회계 장부에 '충당금' 형태로 반영해야 한다. 지난 상반기에 분기당 평균 약 4000억원이던 기아차의 영업이익을 고려할 때 1조원이라는 비용을 3분기에다 한꺼번에 반영하면 6000억원에 이르는 영업 손실은 불가피하다.
가뜩이나 중국 판매 부진 등으로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7870억원)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4% 급감한 가운데 통상임금 1심 판결까지 겹치면서 기아차는 2007년 3분기 이래 10년 만에 영업 적자로 전환될 위기에 처했다.
기아차 지분이 33.88%인 현대차도 지분법에 따라 이 적자를 지분 비율만큼 떠안게 된다. 통상임금 판결이 현대차그룹 전체의 경영 악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통상임금 폭탄' 맞은 한국 자동차 산업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계가 결국 통상임금이라는 '폭탄'까지 안게 됐다. 1심 판결이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결과가 뒤집힐 수 있지만 업계는 다른 자동차 관련 기업들의 유사 소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을 우려했다.
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까지 한국 자동차의 내수·수출·생산은 2년 연속 감소했다. 올해 상반기 자동차 수출량(132만1390대)은 2009년(93만8837대) 이후 8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특히 중국 시장 판매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갈등 여파 등으로 1년 전보다 40% 이상 급감했다. 같은 기간 내수 판매도 4% 줄어 증가세는 3년 만에 꺾였다. 상반기 자동차 부품 수출도 덩달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8% 줄었다. 공장가동률은 2014년 96.5%에서 올 상반기에 93.2%로 떨어졌다.
이 가운데 법원이 기아차 노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노·사 갈등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 완성차 5개사 가운데 현대·기아차와 한국GM은 아직 임금·단체협약 교섭을 매듭짓지 못했다. 쌍용차와 르노삼성이 무분규로 임단협을 타결한 것과 대조된다. 현대차는 노조가 새 집행부 선출 때까지 교섭을 중단하기로 해 경영 불확실성은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기아차는 통상임금 소송 선고를 계기로 교섭을 본격 재개할 예정이지만 노·사 간 이견이 커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이에 자동차 업계는 위기 상황의 직·간접 원인으로 인건비 부담을 지목해 왔다. 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완성차 5개 업체의 연간 평균 임금은 2016년 기준 9213만원으로 토요타(9104만원), 폭스바겐(8040만원)보다 높은 수준이다. 또 국내 5개사의 매출액 대비 평균 임금 비중은 12.2%로 폭스바겐(9.5%), 토요타(2012년 7.8%)를 웃돈다.
이런 상황에서 통상임금이 확대되고 소급분 지급까지 인정하는 판결이 다른 소송에까지 이어지면 추가 인건비 부담이 불가피한 만큼 경영상 어려움이 커진다고 업계는 호소하고 있다. 법원에는 기아차를 비롯해 르노삼성을 제외한 완성차 4개사 관련 통상임금 소송이 걸려 있다. 부품업체의 경우도 현대모비스·만도 등이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등 업계 통상임금 소송전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국내 자동차 제조사가 사드 여파에다 노조 파업, 통상임금 문제까지 겪고 있다”면서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자동차로 대표되는 자동차 산업의 격변기에 충실한 대응이 이뤄질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태준 자동차 전문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