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화폐 시장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의 규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내 시장은 연일 확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 가상화폐 거래량 3위 국가로 올라섰다.
신규 가상화폐 거래소가 속속 문을 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객장까지 등장했다.
세계 각국에서 가상화폐를 둘러싼 경고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한국의 가상화폐 거래 시장은 더 진화하는 형국이다.
가상화폐 공개모집(ICO) 금지 등 강력한 규제 방침을 정한 중국, 가상화폐를 결제 수단의 일종으로 인정한 일본과 달리 한국 규제 당국의 가상화폐 관련 방침은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벌어진 일이다.
◇규제 공백이 기회다…줄 잇는 신규 가상화폐 거래소
2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이달 들어 핀테크 기업의 가상화폐 거래소 신규 설립이 줄을 잇고 있다. 카카오스탁을 운영하는 핀테크 기업 두나무는 다음 달 가상화폐 거래소 '업비트'를 시범 개장한다. 미국 가상화폐 거래소 비트렉스(Bittrex)와 독점 제휴, 111종에 이르는 가상화폐를 국내에서도 거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지난달 말에는 코인플러그가 가상화폐 거래소인 'CPDAX'를 개장했다. CPDAX는 이달 초부터 거래 수수료 페이백 서비스를 내걸고 회원을 유치하고 있다.
빗썸, 코빗, 코인원 등 기존의 가상화폐 거래소도 다양한 방식으로 투자자 유치에 한창이다. 코인네스트는 다음 달 실시간 가상화폐 거래가 가능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출시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 11일에는 코인원이 서울 여의도에 오프라인 객장을 열었다. 빗썸 역시 지난달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오프라인 상담 창구를 개설했다.
최근의 연이은 가상화폐 거래소 설립은 정치권에서 불거진 가상화폐 거래소 인가제 도입이 발단으로 작용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월 말 가상화폐 취급업 인가 등에 관한 규정을 전자금융거래법에 신설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이후부터다. 인가제 시행 이전에 서둘러서 거래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업계에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법안 발의 이후 한 달여 만에 나온 정부의 대응 방향은 시장 예상과 크게 달랐다. 정부가 인가제 도입 등 법·제도 기반을 마련할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과 달리 자금 세탁과 유사 수신 행위 등 기존 법에 규정된 불법 행위만 처벌하겠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방송통신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6일 가상화폐 거래소 등의 실태 점검에 나서며 개인정보 보호, 해킹 등 사고 방지에 우선 집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업계 관계자는 “인가제 도입으로 신규 진입을 막고 건전성 관리를 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정부가 사실상 가상화폐 판단을 유보했다”면서 “정부가 당분간 전면 규제를 내놓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기존 거래소도 속속 신규 사업에 진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규제와 제도화 사이…한국 시장 3위로 발돋움
우리 정부의 가상화폐 시장에 대한 명확한 해석 유보는 중국에서 막힌 자금의 한국행을 자극하는 꼴이 됐다.
중국 인민은행과 증권감독위원회 등 7개 금융 규제 당국이 지난 4일 ICO를 불법자금 조성 행위로 규정하면서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가상화폐 가격은 급락했다.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지난 1일 1792억달러에 이르던 가상화폐 전체 시가총액은 25일 현재 1290억달러로 내려앉았다. 우리 돈으로 57조원에 이르는 가치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중국 시장에서 거래가 막힌 자금은 일본과 한국으로 흘렀다. 비트코인 관련 전문 매체 크립토코인스뉴스와 코인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지난 21일 비트코인 원화 거래량은 하루 1만5408비트코인(약 651억원)으로 점유율 5.55%를 기록했다. 일본 엔화(49.13%)와 미국 달러화(32.73%)에 이어 세계 3위다. 크립토코인스는 “중국 가상화폐 시장의 거래량이 일본과 한국으로 이동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실제 가상화폐 거래 중심은 올해 들어 급격하게 일본과 한국으로 넘어오는 추세다. 가상화폐를 사실상 지급 결제 수단으로 인정한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더 빠르게 시장이 커지고 있다. 미쓰비시 도쿄UFJ은행, 미즈호은행 등은 자체 가상화폐 정식 발행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크립토컴페어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비트코인 거래의 95.46%를 차지하던 중국 위안화는 이달 들어 5.11%로 줄었다. 반면에 일본 엔화가 비트코인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 3.04%에서 53.56%로 늘었다.
일본은 올해 초 자금결제법 개정을 통해 “가상통화는 결제 수단의 하나로서 재산 가치가 있으며, 재산 가치란 가상통화가 불특정 다수 간 지불 수단 기능과 법정통화와의 교환이 가능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동시에 가상통화교환업에 등록제를 도입하고 교환업자 감독 및 업무 규제를 명시했다.
한국도 규모가 커졌다. 같은 기간 비트코인 거래에서 한국 원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0.05%에서 5.97%로 증가했다. 9월 기준으로 이더리움 거래에서 한국 원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46.5%에 이른다. 미국 달러(26.63%), 비트코인(18.98%)보다 많다.
◇'금융 혁명 vs 튤립 버블'…끊이지 않는 논란
가상화폐를 둘러싼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시장에서는 “미래 금융 부문의 잠재적 혁명”(마크 카니 영국 중앙은행 총재)이라는 긍정론과 “비트코인은 튤립 버블보다 더 큰 사기”(제이미 다이먼 JP모간 CEO)라는 부정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가상화폐 평가 유보는 한국 정부뿐만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가상화폐 규제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세계 가상화폐 거래량 2위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이 대표 사례다. 규제와 과세, 시장 활성화 등 관련 부처마다 다른 방식으로 가상화폐를 접근하고 있다.
법무법인 민후에 따르면 미국 선물거래위원회(CFTC)는 지난 7월 블록체인 스타트업 렛저X의 스와프거래 플랫폼(SEF) 등록을 허용했다. 2014년 테라익스체인지의 최초 등록 이후 3년 만이다.
반면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의 상장 심사를 미루고 있다. 7월에는 ICO를 통한 자금 모집이 사실상 증권과 같은 방식을 띠고 있다며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 지급에도 증권 관련 법률을 적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재무부는 2014년 가상화폐를 과세 대상으로 간주, 600달러 이상의 가상화폐 거래는 지급 내역을 보고하도록 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법원이 자금 세탁 사건과 관련, 비트코인을 화폐로 파악하는 판결을 내렸다.
김경환 민후 대표 변호사는 “중국이 ICO 규제 조치를 전격 들고 나선 것은 결국 중앙은행이 직접 가상화폐 발행 권한을 쥐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 “최근 가상화폐 열풍이 자금 유입 등 금융 산업 측면에서는 긍정 효과가 있는 만큼 적정 수준에서 규제하면서도 동시에 관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금융 당국 내부에서도 섣불리 가상화폐의 성격 규정에 나서기보다는 시장 동향을 관망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세계 3~4위 규모로 커진 시장에 설익은 대책을 내놓는 것보다는 당분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가상화폐 세계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지켜보는 게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서 “물론 유사 수신 행위 등 사기 행위에 준하는 방식으로 돈을 긁어모은 행위는 강력 처벌한다는 데 각 부처가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