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87> 멈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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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1637년) 12월 28일. 청군의 포위로부터 버틴 지 열사흘이 됐다. 군량과 마초가 바닥을 드러냈다. 체찰사 김류는 별장에게 총수 300명으로 북문에 나가 기세를 보이라 한다. 북문과 남문 대장이 나서서 반대한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다. 군사를 성 밖으로 내몰았다. 법화골을 따라 매복이 여럿 보였다. 돌아와서 이런 상황을 고한다. 그러나 성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물러서는 자는 베겠다고 한다. 호된 위협에 성 아래로 내려선다. 결국 출정한 별장과 병사는 아무도 살아오지 못한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치른 가장 큰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1970년 RCA는 실렉타비전의 첫 시제품을 만든다. LP 크기 비디오플레이어였다. 전문가들은 곧 구식이 될 거라고 했다. 기술이 디지털로 옮겨 가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추진된다. 1981년 첫 제품을 선보였다. 소비자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새 제품을 선보인 뒤 생산 시설을 늘렸다. 그러나 결국 1984년에 생산을 중단한다. 14년 노력과 개발비 5억8000만달러를 날린 뒤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관료 관성 탓으로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반복되고 피해 또한 너무 크다. 왜 그토록 실패는 멈추기 어려운 것일까. 이자벨 로이어 파리대 교수는 원인은 무능함이나 관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제는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집단 공감에 있다.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에실로는 혁신 기업이다. 1959년 다초점렌즈 배리룩스를 처음 개발했다. 1979년 새 기회를 찾은 듯 보였다. 유리와 플라스틱 합성 렌즈였다. 경영진 사이에 가격과 내구성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그 사람은 너무 비판적이잖아”라는 한마디로 무시된다. 프로젝트는 1980년에 최종 승인된다.

그해 9월 첫 흉보가 들려온다. 미국 판매 허가가 쉽지 않았다. 내구성 문제였다. 매출 감소가 예상됐지만 진행하기로 한다. 1981년 1월 시제품에서 다른 문제가 드러난다. 갈라짐 현상이다. 제품을 교환해 주기로 하고 넘어간다. 시험 생산에서 다른 문제가 고개를 든다. 생산비가 예상보다 2배나 들었다. 안경 하나 기격이 6배가 됐다. 1982년 6월에 제품이 출시되지만 소비자 반응은 싸늘했다. 판매는 예상의 10분의 1에 그친다. 내구성 문제도 현실이 된다. 위기감이 커졌다.

그러나 '실패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 컸다. 1987년 말 3세대 제품이 출시되지만 판매는 여전히 저조했다. 1989년 봄, 네 명의 경영진이 프로젝트에 새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9월 프로젝트 포기를 건의한다. 결론은 자명했다. 여태껏 수익을 남기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없다. 1990년 9월, 생산을 중단한다. 첫 경고음이 들린 후 10년 동안 진행됐고, 에실로에 5000만달러의 손실을 안긴 것으로 긴 여정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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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할까. 로이어 교수는 세 가지를 제안한다. 무엇보다 두 가지 안전장치를 만들라. 첫째 프로젝트팀에 객관 시각을 유지하라. 에실로에 성공을 믿는 사람은 많다. 서로 오랜 친분이 있었다. 누구도 우정을 깨는 비판을 하려 하지 않는다. 에실로가 그나마 손실을 줄인 데에는 새 관리자가 참여한 탓이다.

둘째 조기경보시스템을 만들라. 에실러에도 이른바 스테이지 게이트라 불리는 절차가 있다. 그러나 성공 기대 앞에서 적용되지 않았다. 나쁜 정보는 무시됐고, 시장 분석마저 건너뛰었다. 셋째 새로운 역할을 설계하라. 프로젝트가 책임자 없이 실행하기 어려운 것처럼 잘못된 프로젝트를 멈추는 것 역시 누군가가 필요하다. '출구책임자(Exit Champion)'를 두라.

실렉타비전이 실패하자 원인을 물었다. 변명은 간단했다. 성공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고, 단지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 그리고 RCA는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 잘못된 프로젝트를 멈추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중정남한지'는 그날을 이렇게 쓰고 있다. “네 문의 장수들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이라 하였으나 그는 친히 북문 위에 좌정해서 깃발을 세우고 북을 쳐 독전하였다.” 어쩌면 그날 누군가가 북을 치며 독전하는 대신 꼭 출정해야 하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면 병자년 남한산성 전투의 향배가 바뀌지 않았을까. 한번 상상해 본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