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21일(현지시간) 수입 세탁기 긴급수입조치(세이프가드) 권고안을 발표했다. 120만대 이상 수입 초과 물량에 50% 관세를 부과한다는 게 골자다. 미국 세탁기 시장을 공략하는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비상이 걸렸다. 미국에 수출하는 양사의 세탁기가 250만대가 넘는 것을 고려하면 수출 물량의 다수가 '세금 폭탄'을 맞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종 결정이 남았지만 세이프가드 발동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란 게 업계의 중론이다.
업계에서는 세이프가드로 대표되는 미국 보호무역주의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대표 전략이 '프리미엄 가전'이다. 세이프가드가 금액이 아닌 판매 대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적게 팔아도 이문이 남는 고가 제품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120만대라는 저율관세할당(TRQ) 물량을 중저가보다 프리미엄 제품 비중 확대로 해결하는 방안이다.
고가 프리미엄 가전은 중저가 제품보다 마진율이 좋다. 팔아서 남기는 게 많다는 의미다. 박리다매인 중저가 제품 대비 수익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 제조사 실적에 긍정 요인이다. 이번 세이프가드 권고안은 미국이 수입하는 모든 제품에 관세를 부과한다. 120만대라는 TRQ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가져가는 할당량은 훨씬 줄어들게 된다. 이때 판매 세탁기의 프리미엄 비중을 높이면 TRQ를 '상쇄'할 수 있다. 대신증권 관계자는 “세탁기 북미 수출을 시장점유율(M/S) 증가보다 수익성 제고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면서 “수출 물량 가운데 프리미엄 제품 비중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탁기뿐만 아니라 수출 가전 전반에 프리미엄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보호무역주의가 세탁기뿐만 아니라 가전 전 제품에 확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월풀 등 미국 가전 제조업체가 “산업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으로 다른 가전의 수입 규제를 요청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보호무역주의가 세탁기에만 한정될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면서 “가전 전반에 걸친 다각도 대응 방안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의주시했다.
지난 2011년에 미국은 한국산 냉장고 반덤핑 여부를 조사, 세이프가드를 검토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우수한 품질의 한국산 냉장고가 미국산 냉장고와 경쟁 관계에 있지 않다는 논리로 반덤핑 관세를 피했다. ITC 위원들은 미국 냉장고 산업의 경영 실적 악화는 시장 선도 기술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전 기술력이 나날이 높아지는 만큼 미국 가전업체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 시장조사업체 트랙라인 등에 따르면 1분기 기준 삼성전자 가전은 미국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LG전자도 월풀을 제치고 시장 2위에 올랐다.
삼성전자 셰프콜렉션, LG 시그니처 등 프리미엄 브랜드를 적극 활용해 마케팅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삼성 셰프콜렉션은 냉장고, 식기세척기, 오븐, 전자레인지 프리미엄 제품군이다. 최근에는 초프리미엄 제품인 셰프콜렉션 포슬린을 출시, 미국 시장 공략을 준비하고 있다. 세탁기에는 플렉스워시, 애드워시 등이 있다. 드럼세탁기와 전자동 세탁기의 강점을 결합한 프리미엄 세탁기 '퀵드라이브'도 내년에 출시한다.
LG 시그니처는 가전 대부분을 포함하는 프리미엄 제품군이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지 1년 만에 LG전자 해외 가전 사업의 성장을 견인한 핵심 제품이 됐다. LG전자는 지난달 뉴욕 프리미엄 백화점에 LG 시그니처 제품을 전시하는 등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LG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프리미엄 가전 전략을 핵심으로 밀고 있다”면서 “실제 미국 등 현지 소비자 반응이 좋아 판매량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관계자는 “프리미엄 가전은 관세 상승에도 브랜드 충성도가 월풀보다 높아 가격 저항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전자는 최고급 가전 라인업인 '데이코'를 적극 활용할 수 있다. 데이코는 삼성이 지난해 인수한 미국 럭셔리 가전 브랜드다. 빌트인 냉장고, 쿡톱, 오븐, 식기세척기 등이 주력 제품이다. 북미 주택, 부동산 관련 시장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높다. 가전 패키지가 수천만원에 이르는 등 판매에 따른 수익이 크고,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기 때문에 관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LG가 프리미엄 전략을 앞세워 미국 시장을 공략하면 뛰어난 기술과 성능으로 미국 소비자들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장기로는 월풀 등 미국 가전제조사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지속 선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