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와 재료 등 반도체 후방 산업계의 정부 육성 정책은 지금까지 '빠른 추격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값비싼 외산 제품과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산 장비, 재료를 개발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구매 비용을 낮출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두 대기업이 내부 구매 자료를 통째로 내어주면서 국산화율 조사에 응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증착, 식각, 세정 등 많은 장비가 그렇게 국산화됐다. 매출 수천억원에서 1조원에 이르는 장비 재료 기업도 탄생했다. 그러나 특허소송 등 견제가 심해지면서 더 이상 외산 제품을 단순 카피하는 전략이 통하지 않게 됐다.
노광, 측정계측을 포함한 고부가가치 분야는 정부 육성 정책으로 해결될 사안도 아니다. 산업계, 학계, 정부도 이 같은 의견에 동의한다. 반도체 후방산업 국산화율은 마지막 조사 때나 지금이나 '그 수준 그대로'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더 해도 늘지 않으니 조사가 수년째 이뤄지지 않아도 큰 문제 제기가 없었다.
차세대 분야는 다르다. 단순 국산화율이 아닌, 더 많은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반도체는 미세화를 이어가기 위해 매년 생산 공정이 변한다. 미래를 내다본 선도형 육성 정책도 그래야 나온다. 기업 스스로 노력도 필요하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삼성전자가 인텔을 넘어 세계 1위로, SK하이닉스도 세계 3위 반도체 업체로 성장한 만큼 후방 산업계도 그에 걸맞은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SML이나 어플라이드 같은 기업이 매년 매출액 15~20%에 이르는 막대한 연구개발(R&D) 자금을 쏟아붓는 것과 달리 국내는 일부 몇몇 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 비중이 5%선에 머물러 있다”면서 “기초 체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만 기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정부 지원이 필요한 분야는 밸브, 히터, 실링, 전력모듈과 같은 장비 부분품과 소모성 부품 분야라는 의견도 나온다. 국내에는 이런 장비 부분품에 대한 조사가 전무하다. 분류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어떤 해외 기업이 잘하는지, 어떤 국내 기업이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지 알 수 없다. 체계화된 조사가 필요하다. 국내 반도체 대기업도 이쪽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동의했다.
대기업 구매 담당 임원은 “장비는 국산화됐지만 핵심 부분품, 소모성 부품은 여전히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완전히 국산화 됐다'고 말하기 힘들다”면서 “진정한 경쟁력은 바로 부분품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기업과 대학에선 공공R&D 인프라에 대한 요구도 높다. 벨기에 반도체 연구기관인 IMEC에는 차세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시설이 구축돼 있다. 이 장비는 대당 가격이 1500억~2000억원 수준이다. 일본 JSR 같은 글로벌 반도체 감광액 업체를 포함해 각종 차세대 공정 장비 분야 기업과 연구가들이 IMEC에 둥지를 내리고 R&D를 진행하고 있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IMEC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전국 각지에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국가 주도 나노팹에 대한 정리와 통합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