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14일(현지시간) 표결을 통해 마침내 망중립성 원칙 폐지를 결정, 세계 인터넷 산업계에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 요금이 오르고 스타트업 등 중소기업 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라며 소송으로 저지하겠다는 반발 세력도 등장했다. 하지만 FCC 결정이 합법 절차를 밟은 것이어서 소송으로 망중립성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에선 막연한 추측보다 향후 예상되는 망중립성 헤게모니 싸움에 대응하는 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美 망중립성 폐지…소송으로 뒤집기 힘들 듯
트럼프 행정부가 망중립성을 폐지하는 '리스토링 인터넷 프리덤 오더' 즉 '인터넷 자유 복원 명령'을 발표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정치권이나 정보기술(IT) 업계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3년 전과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2014년 버라이즌이 소송을 통해 '오픈 인터넷 오더(망중립성 지지)'를 뒤집을 수 있었던 건 FCC의 결정적 실수 덕분이었다. 버라이즌 행정소송 당시 콜롬비아 항소법원은 FCC가 통신서비스와 정보서비스를 혼동했다고 지적했다. 망중립성 핵심인 '비차별성'은 공공서비스로 분류되는 통신서비스에만 적용할 수 있고 당시 정보서비스이던 인터넷접속서비스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FCC가 망중립성 제도를 만들 권한은 있지만 이것을 정보서비스에 적용하는 권한까지 없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결국 FCC가 망중립성을 도입하려면 인터넷접속서비스를 통신서비스로 재분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2015년 오바마 행정부 FCC는 실제로 그렇게 했고, 역대 가장 강력한 망중립성 제도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통신업계는 또 한 번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번에는 법원이 FCC 손을 들어줬다. FCC 결정이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트럼프 행정부 FCC의 망중립성 폐지 결정 역시 동일한 방법을 사용, 행정소송으로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미국 민주당이나 IT업계 등이 소송을 준비한다는 외신 보도로 볼 때 망중립성 폐지 정책이 확정·시행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FCC 의결은 연방관보 게재 후 60일이 지나야 효력을 발휘한다. 의회가 나서 망중립성을 지지하는 법안을 만드는 게 가장 큰 변수로 거론된다.
◇종량제 온다?…잘못된 추측들
망중립성은 인터넷 망투자 비용을 누가 내느냐를 둘러싼 중요한 문제인데도 '인터넷 요금이 오를 것' '중소 인터넷 기업이 퇴출될 것' 등 막연한 추측이 합리적 논의를 가로막고 있다.
가장 잘못 알려진 게 종량제 도입에 따른 인터넷 요금 인상이다. 실제로 미국과 우리나라 모두 인터넷 소매 요금을 올리기는 힘들다. 정부 규제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망중립성 폐지로 인한 중요한 변화는 인터넷접속제공사업자 규제 권한이 FCC에서 연방통상위원회(FTC)로 이관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통신법이 아닌 공정거래법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다. 미국은 국토가 넓어 지역별 인터넷 독과점이 심하다. FTC 요금 규제가 강할 수밖에 없다. 11일 FCC와 FTC는 인터넷 소비자 권리를 지키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교환했다. 한국은 인터넷접속제공사업자가 기간통신사업자로 분류돼 요금인가 등 매우 강한 규제를 받는다. 양국 모두 요금인상은 어렵다. 개인 이용자 접근을 막는다거나 특정 콘텐츠 접근 시 추가요금을 받는 것 등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다만 유료서비스 가격이 오를 가능성은 있다.
망중립성이 폐지된다고 인터넷접속제공사업자가 콘텐츠사업자로부터 마음대로 요금(망이용대가)을 올려받기는 쉽지 않다. 콘텐츠사업자를 유치하려는 시장 자체가 경쟁시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트래픽을 차단하거나 속도를 제어하는 것이다. 인터넷접속제공사업자가 권한을 무기로 쓴다면 과도한 트래픽 유발 사업자 속도를 느리게 하는 식으로 요금인상을 관철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과거 망중립성 논쟁을 불러일으킨 계기를 살펴보면 트래픽 속도를 제어하거나 아예 차단할 때가 많았다. 미국에선 2007년 컴캐스트가 P2P 접속을 제한하면서 망중립성 논란이 일었다. 국내에서도 2006년 LG파워콤(현 LG유플러스)이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 하나TV를 차단한 게 망중립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 헤게모니 싸움 불붙을 듯
미국 망중립성 폐지가 당장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정부도 국내와 무관한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설사 망중립성이 일부 완화된다고 해도 인터넷 규제가 강한 국내 현실에서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길게 보면 망중립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이 국내 인터넷 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당장 5세대(5G) 이동통신 시대를 대비한 망중립성 논의가 필요하다. 막대한 투자비가 필요한 5G는 비용 부담 이슈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5G 망으로 돈을 버는 사업자가 투자비를 일부 부담하자는 요구가 나올 수 있다. 네트워크 슬라이싱 등 5G 기술 자체 내에 망중립성과 양립할 수 없는 차별 요소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미국에서 망중립성이 폐지되고 실제로 과도한 트래픽에 대한 추가 과금이 이뤄진다면 구글, 페이스북 등 미국 플랫폼 기업이 세계 각국에서 누리는 '무임승차'에 가까운 특혜는 거센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김용주 통신방송 전문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