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첨단기업 안전보건자료를 완전 공개하거나 공개 청구할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을 추진한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시절 발의한 산안법 일부개정 법률안과 방향성이 일치한다. 다른 여당 국회의원들도 비슷한 법안을 발의했다.
삼성전자 작업환경측정보고서 외부 공개 여부로 기술유출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아예 법으로 정보공개를 명시하겠다는 것이다. 정보공개를 법으로 강제하면 우리나라 첨단기술 보호체계는 무장해제 될 수 밖에 없다. 산안법 개정안은 기존 산업기술유출방지법과 상충되기에 법제정 과정에서 논란을 예고했다.
고용부는 지난 2월 9일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본지가 산안법 개정안을 분석한 결과 법안에는 모든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고용부에 제출하고 고용부는 제출받은 자료를 전산으로 공개하는 법률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MSDS는 화학물질을 안전하게 사용·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기재한 문서다. 화학물질을 다루는 모든 사업주가 MSDS를 작성해 사업장 내에 비치한다.
산업계 관계자는 “외국에서도 기업의 모든 화학물질 MSDS를 제출받아 온라인으로 누구에게나 공개하는 입법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근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은 물질 혁신이 경쟁력을 좌우하는데, 개정안이 통과되면 단지 클릭 몇 번으로 상대 회사 신물질 정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영업비밀은 기업이 자율적으로 판단했고 이를 남용하면 5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했다. 그러나 개정안에는 일부 내용을 영업비밀로 가리고자 할 경우 고용부 장관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는 규제안도 집어넣었다. 미국의 경우 산업계가 스스로 영업 비밀 여부를 판단하고 사업주와 근로자간 분쟁이 발생했을 때 공개 여부에 관한 심사 과정을 거친다.
이 같은 고용부의 산안법 전부 개정안 일부 내용은 현 김영주 고용부 장관이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2016년 10월 31일 발의했던 산안법 일부개정 법률안 방향성과 대부분 일치한다. 의원 시절 발의한 법률 개정안이 장관이 되면서 '정부안'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고용부는 “전부 개정안은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현재 국회 계류 중인 의원입법안과 병합심사될 것으로 예상되며, 정부는 개정안이 신속하게 통과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산업계에선 고용부 방침이 환노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송옥주, 강병원, 신창현 의원이 발의한 산안법 개정안을 병합해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로 보고 있다. 이들은 2016년 하반기와 지난해 초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업 내 핵심 자료를 외부에 공개해야 한다는 취지로 산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재 환경노동위 소속 국회의원은 대부분 노동계 출신이며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의원은 사실상 전무하다.
강병원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작업환경측정보고서는 물론이고 역학조사결과, 유해위협방지 계획서, 공정안전보고서 등 기업의 각종 기밀 자료를 공개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유해위험 방지계획서와 공정안전보고서에는 생산공정 흐름도와 장비 목록 및 배치도, 건축물 평면도, 공정설계와 운전조건 같은 정보가 포함돼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영업비밀 여부는 기업이 아닌 외부인 주축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결정하게 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해당 자료가 만약 중국으로 유출되면 단숨에 따라잡히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
[분석] 산안법 기습 개정으로 졸속 우려…첨단 기술 줄줄이 샐 판
고용노동부가 입법예고한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은 반도체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 화학 등 산업계 전반에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그간 영업비밀로 보호한 기업 핵심기술이 중국 등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 이 법에 대한 논란이 산업 각 분야에서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부는 지난달 9일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을 급작스럽게 입법예고 했다. 보통 개정안을 내놓기 전 각계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반영하는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산업계에선 기습 입법예고라는 비판도 거세다. 입법 예고 기간이 끝났음에도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 하위법령 개정안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도 이를 방증한다고 입을 모은다.
입법 예고 기간 동안 간담회나 공청회도 이뤄지지 않았다. 입법 예고기간이 지나고 일주일 뒤 한 차례 형식적 공청회가 열린 것이 전부다.
산업계 관계자는 “의견 듣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평가했다. 입법 예고를 졸속으로 한 탓에 관련 업계에서도 이 같은 전부개정안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예 이런 법이 없는 외국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 등 첨단기술기업을 이전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실화할 수 없는 내용이 개정안에 포함돼 있는 것도 문제다. 한 예가 모든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고용부에 제출하고, 고용부는 제출받은 자료를 전산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이 자료에는 제조수입자 정보와 구성성분의 명칭 등이 포함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어떤 물질을 누구로부터 받아서 쓰는지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부 산안법 전부개정안이 환노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송옥주, 강병원, 신창현 의원이 발의해 국회 계류 중인 의원입법안과 병합돼 통과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된다.
이 경우 현재 논란이 되는 역학조사결과, 유해위협방지 계획서, 공정안전보고서 등 기업의 각종 기밀 자료를 공개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이들 자료에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보다 더 많은 기업의 노하우와 기술이 집약돼 있다. 영업비밀 여부도 기업이 아닌 외부인 주축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결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계 관계자는 “근로자 질병에 대해 업무 연관성을 규명하는데 필요한 자료는 제공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산재 입증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거나 자료는 원칙적으로 정보공개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면서 “또한 기업의 영업상, 기술상 비밀에 관한 사항은 적극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계에선 정부가 이미 방향을 정하고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현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를 타깃으로 무차별 정보 공개 법안을 만들어서 발의했던 주인공이다. 이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반올림 측 주장에 힘을 보태왔던 박두용 한성대 교수도 작년 연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을 맡았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산재 입증을 위한 역학조사를 맡아서 하는 곳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산재 소송을 이끌었던 박영만 변호사는 올해 초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으로 내정됐다.
정책 결정자가 모두 편향된 인사로 구성되면서 정책 방향은 민주적 논의 과정 없이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