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이념화하는 통신비 폐지 주장

[전문기자 칼럼]이념화하는 통신비 폐지 주장

'래퍼곡선'이라는 게 있다. 아무런 증명 과정 없이 냅킨에 만년필을 몇번 그어 탄생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곡선은 세율을 내리면 조세수입이 늘어난다며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레이거노믹스가 실패한 데다 증명도 없던 탓에 경제학 가치를 상실하고 곧 사라졌다. 잊을 만하면 세금을 깎아 기업 표를 얻어보려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불러내곤 한다. 물론 증명은 없으면서 경제학의 중요한 이론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여전하다. 잘못된 생각이 정치권력과 손잡는 일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을 '이념'이라고 부른다. 이념의 특징은 증명하기보다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성보다 직관이 우위를 점하고, 과정을 더듬어 결론에 다다르는 게 아니라 과정을 결과에 끼워맞춘다.

한 시민단체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면서 당장 손대기 쉬운 분야로 '통신'을 꼽고 이것을 유력 대선주자가 수용하면서 시작된 '통신 기본료 폐지' 운동도 이념의 길을 걷고 있다. 목표에 과정을 끼워맞추며,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버리거나 왜곡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지난 주말 시민단체 주장을 인용한 보도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국내 이동통신 서비스 3사 영업이익률이 6~9%로, 20%가 넘는 해외사업자보다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감가상각 차감 전 이익(EBITDA)으로는 20~33%에 달해 해외사업자와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통사가 감가상각이라는 회계기법으로 소비자를 속여왔다는 게 주장의 요지다. 하지만 EBITDA 기준으로 비교하면 해외사업자는 대부분 이익률 40~50%를 기록한다는 사실은 쏙 뺐다. 경악할 만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더 보자면 이통사 영업이익률은 위험 수준에 접근했다. SK텔레콤은 10여년 전 20%가 넘는 영업이익률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8.7%에 불과하다. KT와 LG유플러스는 5~6%대를 기록했는데, 조금만 내려가면 통신사업을 접고 부동산 임대사업을 하는 게 나을 지경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시민단체는 '이통사 영업이익이 1조원을 넘는다'거나 '억대 연봉' 같은 말로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며 이념을 관철하려 든다.

'이동통신은 유선보다 투자비가 덜 든다'는 황당한 주장도 나온다. 유선통신은 집집마다 선을 깔아야 하지만, 무선은 전파를 쏘기 때문에 유선보다 설비투자가 적다는 것이다. 얼른 듣기에 래퍼곡선보다도 직관적으로 와닿는다. 하지만 무선은 집이 없는 곳에도 기지국을 깔아야 한다는 사실은 잊은 모양이다. 지난해 설비투자는 SK텔레콤 2조원, KT 2조2500억원으로 별 차이가 없다.

그러면서도 통신 품질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정부 공식 발표를 보면 작년 국내 LTE 평균 다운로드 속도는 133메가바이트(MB)다. 뉴욕·런던·파리·프랑크푸르트·도쿄·홍콩·토론토는 잘해야 69MB였고 30~40MB가 보통이다. 지하철은 대부분 '측정불가'였다. 차로 치면 우리나라는 국민 모두가 고급 수입차를 타는 격이다.

더욱이 이제 65세 이상 국민과 저소득층 약 300만명에게 매월 통신요금 1만1000원을 깎아준다. 여기에 싼 요금을 찾아 알뜰폰을 선택한 사람이 800만명가량이다.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월급 200만원 이하' 국민 1000만명에 대해서는 이미 통신비 대책이 마련된 셈이다.

잘못된 이념이 정치권력과 손잡고 한 시대를 풍미해도 시간이 흐르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준다. 다만 경제 전체에 미치는 해악이 그대로 남을까 우려스럽다.

김용주 통신방송 전문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