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자산업계엔 불문율이 있다. 암묵으로 지켜지고 있는 규칙, 삼성전자와 거래하는 장비·부품·소재 업체는 LG전자에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LG전자 협력사는 삼성전자 협력사가 될 수 없다. 이 불문율이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었고 강제했는지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이를 따르거나 지키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는 건 모두가 경험으로 알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불문율은 대개 대기업은 예외고 중소·중견 기업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삼성전기를 보자. 국내 1위, 세계 2위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제조사인 삼성전기는 삼성전자에만 MLCC를 판매하지 않는다. 삼성전자 최대 스마트폰 경쟁사인 애플에도 MLCC를 공급한다. 2017년 사업보고서를 보면 삼성전기는 이 해에 신형 아이폰을 위해 초고용량 MLCC를 별도로 개발하기도 했다.
MLCC가 범용 부품이기 때문일까.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해 애플에 OLED 디스플레이를 만들어 주었다. 지난해 가을에 출시한 아이폰X(텐) 화면이 삼성디스플레이가 독점 공급한 바로 그 OLED다. 삼성디스플레이가 경쟁사인 애플에 OLED를 공급한다 해서 제약을 받았을까. 아니다. OLED를 초기부터 적극 도입해 삼성디스플레이 OLED 사업이 성장하는데 큰 힘을 보탠 삼성전자는 어떤 불문율도 적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장을 증설했다가 주문 감소로 고전하고 있는 게 현 삼성디스플레이 상황이다.
'나는 돼도 너는 안 된다'는 심보일까. 핵심 정보와 기술 보호, 경쟁력 유지의 필요성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협력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우리 식구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는 적대성, 비합리한 편 가르기가 낳는 낭비가 너무 많다는 데 있다.
한 예로 2016년 갤럭시노트7 배터리 발화 사고가 생겼을 때 삼성전자는 문제가 된 삼성SDI 배터리를 중국 ATL 배터리로 교체했다. ATL은 노트7 리콜 악재 속 최대 수혜자가 됐다. 그런데 왜 삼성은 가까운 국내 LG화학을 두고 중국으로 날아갔을까. LG화학이 삼성SDI 경쟁사이기 때문에 안 된다면 중국 ATL도 경쟁사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분법식 편가르기는 중소기업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데 더 큰 심각성이 있다. 최근 대기업에서 투자받은 한 중소기업 대표는 기쁨보다 씁쓸한 감정이라고 말했다. 투자 유치 자체는 반갑고 감사한 일이지만 A사에서 받았기 때문에 B사와의 거래는 사실상 포기해야만 한 것이었다. 해외 유망 기술 기업에는 공통 투자하면서 왜 국내 중소기업은 '예외'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토로를 잊을 수 없다.
조금씩 달라질 조짐도 나타난다. 앙숙과 같던 삼성과 LG 사이에 LCD 패널 공급도 이뤄지고, LG 배터리가 삼성 스마트폰에 공급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협력과 상생은 일회성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대기업에 한정돼도 안 된다. 대기업부터 중소협력사를 향해 솔선수범해야 달라진 모습이 산업 전체로 번지고, 불문율도 깨질 것이다. 합리한 협업이 자리를 잡을 때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변화의 시기다. 구태는 이제 버릴 때가 됐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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