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국내 모 대학 A 교수는 중국 정부로부터 현지 대학에서 연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디스플레이 분야 전문교수지만 분야에 관계없이 본인이 원하는 어떤 분야든 자유롭게 연구하면 되고 연구성과도 묻지 않겠다고 했다. 이뿐 아니라 원하는 한국 연구진 10~20여명을 추가로 받아주고 연구 결과에 따른 특허도 해당 교수가 모두 갖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중국 '디스플레이 굴기'가 기업을 넘어 대학 연구실로 향했다. 주 타깃은 이 분야에서 수십년간 연구개발을 하면서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고 국내외 기업과 교류도 활발한 교수다. 한국 중소형과 대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력이 세계에서 독보적 수준인 만큼 이 분야 연구진에 파격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 발전 역군이라는 사명감과 연구자로서 전에 없이 원하는 연구를 자유롭게 마음껏 할 수 있는 파격 조건 앞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기업 넘어 대학 교수까지…왜?
업계와 정부에 따르면 최근 국내 디스플레이·반도체 업계에는 중국 정부나 현지 기업으로부터 현지 대학으로 이직하거나 공동연구 제안을 받았다는 교수가 많아졌다. 지금까지 주 영입 대상은 기업에서 주요 기술을 담당하는 연구원, 핵심 생산공정을 담당하는 실무진, 전체 생산이나 연구개발을 총괄한 핵심 임원 등이었다.
최근에도 중국 기업은 일정 근로기간을 보장하고 파격적인 연봉 조건을 제시하며 인력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현지 기업에 취업하면 3년 근무 보장에 연봉 3배 이상, 5년 근무 보장에 연봉 5배 이상 등의 조건을 제시한다. 조직 개편, 인사 등으로 더 이상 국내 기업에서 근무를 보장받기 힘들어진 차·부장급 인력이 주로 빠져나갔다. 높은 연봉, 자녀를 현지 외국인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점, 기존 회사에서 좁아진 입지 등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매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는 디스플레이 기술력을 보강하기 위해 한국의 주요 연구진까지 확보하고 나선 셈이다. 중국이 비교적 단기간에 디스플레이 기술력을 끌어올려 대학 연구 생태계가 한국만큼 단단하게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학은 첨단 기술산업에서 전문인력 양성, 차세대 기술 연구개발 역할을 한다. 관련 후방산업 성장까지 영향을 미치는 산업의 뿌리다.
국제정보디스플레이학회(SID) 연간 논문 제출수 추이를 보면 중국이 제출하는 논문 대부분은 기업에서 나온다. 기업이 발표하는 논문은 상용화를 위한 문제해결 중심 연구가 많고 대학논문은 기술 자체가 중심이 돼 좀 더 심도있는 연구를 다루는 게 특징이다.
전 SID 회장을 역임한 김용석 홍익대 교수는 “채택되는 중국 논문이 매년 증가하고 있어 위협이 되지만 전체로 보면 기업 논문 비중이 월등히 많아 아직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 생태계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중국 채택 논문수가 한국을 처음 추월해 세계 1위로 올라섰다”며 “특히 퀀텀닷(QD) 관련 논문이 상당히 많고 마이크로LED 연구도 활발하다”고 덧붙였다.
대학 연구실은 기업과 함께 기술 난제를 해결하거나 기업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경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모두 기업 내부 연구성과가 세계적 수준이어서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만큼 대학 연구실 의존도가 높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 연구실은 기업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 기업 연구소에서 풀지 못한 기술을 함께 해결하고 기업이 대학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대학 연구실은 기업이 해당 분야 연구 경험을 쌓은 전문인력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을 갖췄다. 인력을 채용하면 1~2년간 트레이닝을 거쳐야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데 대학의 석·박사 인력은 이 과정을 최소화하고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다. 해당 기술에 대한 전문 연구경험이 풍부한 게 가장 큰 경쟁력이다.
학계 한 관계자는 “국내 대학에는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을 함께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교수진이 많다”며 “중국으로서는 이들이 현지 인력을 양성하고 기술을 함께 발전시켜서 국가 기술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토대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술 유출 가능성 놓고 정부·대학 의견차
중국 정부·기업의 국내 학계 러브콜에 대해 정부와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학계는 연구 활동이 국경 없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정부는 국책 과제에 참여했던 연구진이 유사한 연구를 중국에서 수행하면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연구 프로젝트를 제안받는 교수진 다수가 우수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았고 이를 토대로 국내 국책과제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례가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국민 세금으로 운용한 국책과제에 참여했던 교수가 비슷한 내용의 해외 연구에도 참여한다면 자연스럽게 연구 내용과 노하우가 흘러나갈 수 있다고 본다”며 “최근 중국 첨단기술 굴기가 강력해졌고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대기업의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 외부 공개가 이슈가 되면서 첨단 기술 해외 유출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이 높아진 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책과제에 참여했던 교수진이 유사한 내용의 해외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법적 처벌 근거는 없다. 정부는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과학기술기본법, 중소기업기술보호법을 비롯해 기타 산업보안관계법령에 따라 국가 핵심기술 유출과 관련 인력 유출을 방지한다. 이는 주로 기업과 연구기관이 대상이며 대학의 연구활동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 미국 등 해외에서도 경쟁국 대학과 연구 프로젝트를 제재하는 사례가 없다는 게 학계 중론이다.
주로 대학 연구가 기초과학 위주여서 상용화 기술과 거리가 있고 기존에 한·중 정부나 기업 간 공동연구를 수행한 사례가 많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기술유출을 우려하는 정부 시각이 자칫 연구 교류 활동에 제동을 거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 대학 교수는 “국책과제와 유사한 내용의 해외 연구를 지원받는 것은 분명히 문제 소지가 있다”면서 “하지만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소명 의식이 있는 연구진이 이런 해외 연구에 참여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되레 한국 정부가 국책과제에 해외 연구진을 참여시키는데 인색하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연구 수행 과정을 입증하는 서류나 보고서 제출이 까다롭고 잦아 실제 연구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는 불만이 나온다.
국책과제에 참여하는 한 대학 교수는 “해외와 공동연구는 참여하는 양쪽 모두 기술 수준을 성장시키는 것”이라며 “정부가 대학의 해외 공동연구 때문에 기술이 유출된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국내 연구진 수준을 저하시키고 해외 교류에 제동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