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연일 폭염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대구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구역사를 나오자마자 38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숨이 턱턱 막힌다. 역사 앞에 설치한 그늘막도 뜨거운 공기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한증막에 들어온 듯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서둘러 택시에 오르는 것 외에는 더위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5년쯤 전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그는 정치를 하겠다며 업계를 훌쩍 떠났다. 정치에 입문한 그가 첫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가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살인적 폭염에도 대구를 찾을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바로 20년 전 '나우누리'로 PC통신 시대를 풍미했고, '아프리카TV'라는 인터넷방송 시대를 열었던 문용식 사장이다. 지난 2011년 갑자기 사업을 정리하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던 그가 지난 4월 NIA 원장으로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언제든 숙식을 보장하겠다'며 대구 회동을 약속했었다. 4개월 만에 그 약속을 이행하러 가는 길이다.
5년여 만에 다시 만난 문 원장은 마음씨 좋아 보이는 동네 아저씨 모습 그대로였다. 나잇살이 좀 올랐을 뿐 푸근한 미소와 사투리 섞인 조근조근한 말투도 여전했다.
그는 자리를 함께 한 경영기획실장과 홍보팀장에게 “20년 지기”라고 소개했다. 사실은 20년에서 2년 정도 빠진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PC통신 시대가 저물고 인터넷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으니 2001년쯤이었다.
그가 나우콤 대표를 맡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는 PC통신을 대체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웹 기반 커뮤니티 서비스와 기업대상 e비즈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PC통신 사업자들에게는 대격변 시대였다.
그는 “새로운 트렌드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트렌드가 바뀌었죠.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차원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파괴적 혁신에 적응해 변신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였어요.”
그는 당시 인터넷을 “아무도 버틸 수 없는 무서운 힘”이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당시 잘나가던 PC통신 회사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나우콤만이 아프리카로 변신해 살아남았다.
“PC통신 사업을 시작할 무렵 KAIST 박사 한명이 사업제안서를 들고 왔어요. PC통신으로 인터넷에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하자는 아이디어 수준이었어요. 달랑 3장짜리. 하지만 일주일 만에 투자를 결정하고 계약했어요. 파격적이었지요. 국내 첫 PC통신 기반 인터넷 접속 서비스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PC통신 시절 얘기도 꺼냈다. “그 박사는 계약하자마자 아이테트를 창업했고, 나우콤은 PC통신 서비스로 대박을 터트렸지요. 그가 바로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을 맡았던 허진호 박사입니다.”
문용식 원장은 인상 만큼이나 상대방을 편하게 해준다. 친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이다. 허진호 박사기 찾아왔을 당시에도 형식보다는 내용을 살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운동권 출신이라 매우 논리적이다. 그는 20대 절반이 넘는 5년 1개월을 감옥에서 보냈을 정도로 치열한 젊은 시절을 보낸 민주화 운동 주역이었다.
네티즌이 직접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는 UCC 방송인 아프리카TV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08년 그는 다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나우콤 웹하드 서비스가 빌미였다.
당시 웹하드에 불법저작물이 많아, 고소 고발이 잇따랐다. 검찰은 나우콤 대표인 그를 구속했다. 인터넷 기업 대표가 불법 저작물 유통 방조 협의로 구속된 것은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인터넷 업계는 강하게 반발했고, 정치 보복이라는 반대 여론이 형성됐다.
그는 약 2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항소심에서 1000만원 벌금형으로 결론이 났지만 20여년 만에 다시 경험한 감옥생활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오랜 세월 못했던 금연도 그때 실천했다.
“당시 나우콤은 기술적 조치가 양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수사라는 탄압을 당했어요. 이유는 저작권법 위반 혐의였지만 아프리카TV가 수십개 방송을 내보내고 수십만명이 이를 시청할 정도로 커지면서 새로운 파워가 생기니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랬을 거예요. 세계 최초 온오프 결합 시위 문화가 만들어졌거든요.”
그는 아직도 10년 전 그 때를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비즈니스하다가 하루밤 사이에 세상과 단절되니 황당했다”면서도 “민주당이 시청 앞에서 탄압이라며 성명을 내고, 시민과 네티즌들은 부당하다면서 석방운동을 해줬다”며 고마워 했다.
사실 이 사건은 그가 정치권에 발을 들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안양교도소를 찾아가자 그는 “일흔여덟 먹은 노모가 시청 앞에 아들 석방운동하러 나간다”면서 가슴아파했다. 무엇보다도 학창시절 옥바라지 하며 고생했던 어머니가 꼬부랑 할머니가 된 지금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그는 “면회 오는 국회의원이 많은데 다들 정치 입문을 권유한다”고 털어 놓았었다. 대부분이 그와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이었다.
물론 그의 정치 인생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내 경선조치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두 번의 당 디지털소통위원장 역할을 하면서 정치권에 정보기술(IT)을 심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정당 사상 최초로 시민이 모바일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당내 경선에 도입했다. 이를 통해 대통령 후보 경선에 80만명의 국민을 참여시키는 흥행을 이뤘다. 온라인 입당시스템을 만든 것도 그의 작품이다. 10만명의 온라인 당원은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문 원장은 “두번의 디지털소통위원장 역할을 하면서 아날로그식으로 운영되던 정당에 디지털을 결합해 현대화시켰다”면서 “특히 국민 참여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등 정치적으로 굉장히 의미가 큰 역할을 했다”고 자평했다.
“정치에 입문해서 투자한 것도, 쌓아 놓은 것도 많은데, 후회는 없어요?” 우문을 던졌다. 준공무원 신분이지만 그래도 IT업계에 돌아왔다는 반가움에 생각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사실 NIA 원장직은 이번 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최고의 IT브레인으로 활약해 온 그에게 가장 걸맞는 자리였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당 지역위원장 및 핵심 당직자로 있으면서 지근 거리에서 현실 정치를 직접 경험했다. 기업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면서 “이 경험을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머쓱한 마음에 농담처럼 “이제 뭐 할 건데요”라고 물었다. 그도 농담처럼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지”라고 답했다. 기업인으로 20년 동안 역할을 많이 했으니 이제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공적인 활동으로 봉사하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이어 “대한민국에 디지털 혁신을 만들어 내고 싶다”고 밝혔다. 혁신 성장은 결국 디지털 혁신으로 이뤄야 하는데, 디지털 혁신은 모든 사회에 디지털을 적용해 생산성을 높이고 더 공평하게 바꾸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그는 “디지털의 힘을 잘 안다”면서 “이를 정부 혁신, 사회 혁신, 경제발전에 활용할 수 있도록 그동안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 실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이미 다른 매체와 몇차례 인터뷰를 하면서 NIA 원장으로서 역할과 계획을 밝힌 바 있지만 이런 속내까지 드러내지는 않았었다.
형식적으로 NIA 사업과 계획을 물었고, 그는 거침 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그는 이미 NIA 역할과 과제, 향후 계획 등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4개월 만에 공부 많이 하셨네요”라며 웃자 그도 따라 웃는다.
'숙식 제공'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일어섰다. 대구에서는 막창에 소주 한 잔이 제격인데 그러기에는 날이 너무 더웠다.
다음은 일문일답.
-NIA가 최근 집중하는 대표 사업이 뭔가.
▲DNA+다. 데이터(D), 네트워크(N), 인공지능(A)과 지능화에 따른 신역기능 대응을 더했다.
데이터 관련 사업으로는 데이터 중심사회를 위한 정책개발, 법·제도 정비와 함께 국가데이터 기반을 구축하고 공공과 민간 데이터 융합과 활용을 촉진하고자 한다.
여기에 4차 산업혁명 시대 초연결 지능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능화를 국가사회에 확산시키기 위해 다양한 인공지능 관련 사업을 추진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파생될 우려가 있는 계층 간 격차 문제와 정보통신기기 과의존 문제 등 역기능에 선제 대응할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공공 분야 빅데이터 개방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달 말까지 700여 공공기관이 보유한 공공데이터를 전수 조사해 연말까지 공공데이터 현황을 보여주는 국가데이터 맵을 만들 예정이다.
최근 공공데이터전략위원회에서 공공데이터 개방 원칙을 기존 포지티브에서 네거티브 정책으로 바꿨다. 국가안보와 개인정보 침해 등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전면 개방하겠다는 의미다.
연내에 누구나 한 곳에서 데이터를 쉽고 빠르게 등록, 검색, 거래할 수 있도록 민간과 공공을 연계한 데이터 거래 기반을 만들 계획이다. 데이터 반출은 안되고 분석 및 인공지능 개발 결과만 내보내는 '데이터 안심존'도 구축한다.
이와 함께 민간 데이터 개방 및 활용에 대한 수요를 파악하고, 데이터 이용자 의견 수렴을 위한 민·관 소통 채널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지방균형발전을 위해 대구 혁신도시로 이전했다. 지역사회에는 어떻게 기여하고 있나.
▲'지역산업과의 만남' 및 '사회적 경제와의 만남' 두 가지 방안으로 추진한다. 대구테크노파크와 협력한 수요공급 연계형 헬스케어 실증단지 조성사업이 대표 사업이다. 지난 3월에는 대구 사회적 경제 종합유통플랫폼인 무한상사와 공동으로 사회적 기업 홍보관을 설치했다.
NIA는 다양한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 조달청 입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역 기업에 직접 혜택을 주기는 어렵지만 입찰에 보다 유리하게 임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는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지역 기업과의 만남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평소 가지고 있는 경영철학이라면.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직원을 신뢰하고 자율로 의사결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직원 열정과 능력을 믿었고, 덕분에 창의적이고 도전적으로 많은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구성원 스스로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도록 자율적 경영환경을 만드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NIA도 마찬가지로 '자율 경영' '신뢰 경영'을 유지할 계획이다.
◇문용식 원장은
1959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외교학으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94년에 나우콤(현 아프리카TV)에 임원으로 입사, 사업본부장을 거쳐 2001년 2월에 대표이사에 올랐다.
2011년 6월 민주당(당시 통합민주당) 인터넷소통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대 대선기간에는 더불어민주당 국민주권 선대위 가짜뉴스대책단장을 역임했다.
현재 김근태재단 부이사장, 공유사회네트워크 함께살자 이사장, 노무현재단 운영위원,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 총리실 공공데이터전략위원회 위원직을 맡고 있다.
'인문의 스펙을 타고 가라' '꾸준함을 이길 그 어떤 재주도 없다' '함께 살자' 등을 저술했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