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 폭염 속에 전기사용량이 늘면서 전기요금 누진제에 대한 원성이 다시 높아졌다. 이르면 이번 주 정부의 관련 대책이 나올 전망이다. 정부는 2016년 누진제를 큰 폭으로 개편한 지 2년 만에 다시 메스를 대는데 부담을 느끼지만 유독 더운 올 여름 날씨가 변수였다. 매년 제기된 누진제 불만이 올 여름은 무더위만큼이나 강도가 높다. 2016년 누진제 대란이 누진율 완화를 요구했다면, 지금은 아예 누진제 폐지까지 요구한다. 누진제 체계에 대한 원론적 고민이 필요한 때다.
◇커지는 누진제 완화 압박, 깊어가는 정부 고민
“전기요금에 대해 제한적으로 특별배려를 할 수는 없는지 검토해 주시기 바란다.”
지난달 31일 국무회의 중 나온 이낙연 국무총리 지시다. 이 총리는 올 여름 폭염을 특별재난 수준으로 규명하며 관련 부처에 전기요금 부담을 덜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누진제 폐지 요청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온 전기요금 관련 첫 정부 공식 언급이었다.
누진제 논란은 폭염이 지나간 후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분위기다. 여름과 겨울이 갈수록 덥고 추워지는 추세에서 같은 불만이 계속 제기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여름을 계기로 한시적 요금 할인이 아닌 누진제 완전 폐지를 염두하고 있다. 정부는 어떻게든 누진제를 향한 불만에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르면 이번 주에 개선책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4일 SNS에 “폭염을 재난으로 명확히 하는 법 개정이 곧 될 것”이라며 “지난 3일 산업부가 두 가지 전기요금 감면 방식을 놓고 최종 판단 중이라는 보고를 했다”고 전했다.
정부는 누진제 조정 방향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국민 요금부담을 줄일 수 있는 대책을 검토하지만 현재로선 확정된 사안은 없다는 입장이다. 2016년 12월 누진체계를 6개 구간 11.7배에서 3개 구간 3배로 수정한 뒤 아직 효과 분석·평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년 만에 같은 문제가 제기되자 난감한 표정이다.
예상을 넘어선 폭염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다. 누진제는 주택용 고객의 전기 과소비를 막기 위한 장치다. 40도를 육박하는 올 여름에는 요금에 의한 절전유도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동안 '헤비유저'로 언급되던 구간이 최근은 일반화됐다.
누진 체계상 한 달 전력사용량이 200㎾h 이하는 910원 기본요금과 ㎾h당 93.3원 전력량요금을 부과받는다. 201㎾h~400㎾h 구간은 기본요금 1600원, 전력량요금 187.9원, 400㎾h 초과 구간은 기본요금 7300원, 전력량요금 280.6원이 부과된다. 7월 요금이 나와봐야겠지만, 많은 국민이 400㎾h 초과 요금을 적용받을까 우려하고 있다.
전력수급기간 특별요금 등 한시적 할인제도가 없었던 것도 반발을 키웠다. 그동안 정부는 동하절기 사회적취약계층 등을 대상으로 한시적으로 전기요금을 할인했다. 누진제 논란이 한창이었던 2016년 여름에는 전 주택용 고객을 대상으로 한시적 완화 조치를 했다. 그해 12월 누진제가 개편된 이후에는 별다른 할인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계시별 요금제 대안, 불만 해소 의문
정부가 전기요금 부담완화 대책을 내놓아도 누진제 자체를 손보기는 힘들다. 누진제는 현재 주택용 고객 전력수요를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삐를 풀어버린 후 발생할 수 있는 에너지 과소비 사태가 가장 큰 부담이다. 그나마 대안으로는 일시적인 △사회취약층 대상 요금 감면 △누진제 구간 통합 및 단계 조정 등이다.
올 여름 최대전력 수요는 그동안 건설된 발전소가 많아 감당이 가능한 상황이다. 2일 국정현안조정회의에서도 올 여름 전력공급능력은 1억73만㎾로 사상 최대 용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상황만 놓고 보면 누진제 고삐를 일정부분 풀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국가전력계획 차원에서 계속 높아져가는 전력수요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급문제를 떠나 그만큼 추가 발전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에너지전환 정책과 함께 공급이 아닌 수요관리 중심 수급정책 방향을 정했다. 국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력한계치를 늘리는 것보다 동하절기 수요를 줄일 수 있는 방안 마련을 고심한다.
정부가 구상하는 대안은 계시별(계절별·시간대별) 요금제다. 일반용·산업용 전기요금처럼 계절과 시간에 따라 요금을 차등화시키는 방법이다. 스마트계량기(AMI) 전국 설치라는 꽤 시간이 걸리는 숙제가 남아있지만, 지금처럼 단순 사용량 누적치에 요율을 높이는 누진제보다는 현실적 수요관리가 가능하다.
전력계통 운영 측면에서도 누진제보다는 부하에 따라 요금을 달리하는 방법이 유리하다. 전력수급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연간·월간 총 사용량보다 순간 피크시 얼마나 많은 사용자가 동시에 전력을 사용하느냐다. 1년 내내 '100' 만큼 전기를 사용하다가도 어느 날 단 1시간이라도 '1000' 수준 전기를 사용하는 전력수급을 맞추려면 '1000'에 해당하는 발전기가 필요하다. 정부가 총 전력사용량보다 순간 전력피크에 민감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계시별 요금제가 지금의 불만을 잠재울지는 미지수다. 요금제는 바뀌어도 정작 소비자 주머니에서 나가는 비용은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주택용 전력사용량과 한전 수익은 6만8543GW와 7조4372억원, 산업용 전력사용량과 한전 수익은 28만5969GW와 30조7154억원을 각각 기록했다. 사용량과 수익 모두 약 4.1배 차이를 보였다.
주택용은 누진제를, 산업용은 계시별요금제를 사용하지만 사용량에 따른 요금은 별 차이가 없다. 누진제를 폐지할 경우 동하절기 높은 전기요금은 피할 수 있지만, 한 해 총 전기요금이 줄어드는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특정시기에 사용량이 많은 가정은 계시별 요금제가 불리하다. 산업용 요금은 전력량 요금이 주택용보다 저렴한 대신 일정한 전력소비패턴을 유지해야 한다. 갑자기 사용량이 많아지면 상대적으로 높은 요금이 부과된다. 평소 절전하다가도 여름과 겨울철에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고객에겐 불리한 요금제도다. 단순 사용량으로 요율을 높이는 누진제보다는 합리적이지만 요금인하 효과를 거두려면 효율적 전력소비 습관을 갖춰야 한다.
전력업계 관계자는 “에너지전환 추진과 송변전 설비 등 더 이상 전원설비를 확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상승하는 최대전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며 “누진제 대책이 단순히 요금부담을 줄이는 일시 처방으로 끝나거나 에너지 과소비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2017년 용도별 전력판매량 및 판매수익>
자료:한국전력
<2016년 누진제 개편전 구간별 가구 분포비율>
자료:한국전력
조정형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