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을 절반 수준으로 줄이는 대신 대규모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광주형 일자리'는 실현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100대 국정 과제 가운데 일자리 창출을 위한 방안으로 추진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가 미궁에 빠져들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힘을 보태고 현대자동차가 참여의향을 밝히면서 급물살을 타는 듯 했지만 노동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현대차 측도 이견을 보이고 있다. 광주시는 예산 국회 심의가 마무리되는 15일을 데드라인으로 잡았다. 그때까지 현대차와 노동계를 설득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그리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용섭 시장은 12일 현대차 노조와 협의를 하고도 내용은 함구했다. 광주형 일자리는 과연 계획대로 실현할 수 있을지 그동안의 추진 현황을 짚어보고 미래를 예측해 본다.
'광주형 일자리'는 투자 위축, 고용 절벽, 청년 실업 등 지역문제를 타개할 노사 상생 사회통합형 대안으로 제시됐다. △적정임금 △적정 노동시간 △노사 책임 경영 △ 원·하청 관계 개선이 주요 목표다.
기업 입장에서는 하청 업체 기술개발과 인력 양성을 지원하고 노동자 대표를 경영에 참여시켜 불량률을 낮추고 투명성을 제고하는 등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이다.
노동자 입장에서도 임금은 줄어들지만 삶의 질을 높이고 일자리를 나눠주는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인식되기를 기대했다. 잔업과 특근을 없애 법정노동시간을 준수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거, 교육, 의료, 교통 등 복지서비스를 제공해 줄어든 임금을 벌충한다는 개념이다.
광주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현대자동차가 참여하는 합작법인을 설립한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오는 2022년까지 빛그린산단 62만8000㎡ 부지에 연간 10만대 규모 완성차 공장을 세울 계획이다. 사업비는 총 7000억원으로 책정했다. 이 가운데 2800억원은 참여자 투자, 4200억원은 금융권 차입으로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광주시와 현대자동차가 각각 590억원(21%)과 530억원을 투자하는 형태로 참여하기로 했다.
이렇게 설립한 합작법인에서는 1000㏄ 미만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위탁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합작법인 근로자 임금은 국내 완성차 업체 5곳 평균 연봉 수준인 9213만원의 절반 수준에 맞추기로 했다. 광주시는 기업 유치를 위해 적정 임금을 더 낮춰 3500만원대로 설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는 이를 통해 직접 고용 일자리 1000여개, 간접고용을 포함해 1만여 개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외로 빠져나가는 기업을 광주로 불러올 수 있고 청년 유출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 같은 광주시 계획은 문재인 정부 국정 과제로 채택됐다. 반값 연봉과 복지를 결합해 청년 실업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하지만 이 같은 청사진은 곧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현대차가 지난 6월 투자의향을 밝히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반값 연봉의 공장이 만들어진다' '노동자의 임금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해석이 확산되면서 노동계가 반대하고 나섰다.
광주시와 현대차는 지난 6월 19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형 일자리 투자협약 행사를 열기로 했지만 하루 전날 무기 연기했다. 이용섭 시장이 취임하고, 8월 안에 협약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역시 무산됐다.
한국노총은 “협상에서 노동계가 배제됐고,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면서 발을 뺀 것이다. 한국노총은 지난 9월부터 노사민정 협의체에 불참하고 있다.
이용섭 시장이 12일 정진행 현대차 사장을 만나 투자협약을 논의했지만 세부 쟁점에서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이에 앞서 현대차 노조는 임금 하향 평준화를 우려하며 회사가 합의문에 서명하면 총파업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노조는 “광주형 일자리는 최악의 포퓰리즘 정치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근로자의 질을 낮추고, 경차 시장을 포화시켜 결국 국내 자동차 산업 근간을 흔들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결국 '광주형 일자리'의 미래는 어두워졌다. 노동계와의 소통 부족과 현대차와의 투자조건을 둘러싼 복잡 미묘한 이견이 발목을 잡았다.
현대차는 광주형 일자리의 지속 가능성과 비교적 높게 책정한 초임 등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광주시에 3500만원 이하를 요청한 반면 시는 3500만원 이상을 고수하고 있다.
다만 시는 현대차와 투자 협상을 지속해 내년 예산에 사업비를 반영하면 다시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와 노동계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이라 15일 진행할 막판 협상이 실패하면 추진 동력은 급격히 사라지게 된다. 광주형 일자리 좌초는 광주시 이미지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광주=김한식기자 h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