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바로 게임이 우리에게 할 일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을 '오락'이라 하고, 삶의 빈틈을 메우는 하찮은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게임은 그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 게임은 미래의 실마리다. 어쩌면 지금 진지하게 게임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책일지도 모른다.”
미국 철학자 버나드 슈츠가 한 말이다. 최초 비디오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Tennis for Two(2인용 테니스 게임)'는 물리학자인 윌리엄 히긴보텀이 연구소 방문객에게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장치로 개발했다.
초기 비디오게임은 과거 놀이(문화)를 계승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생산성 추구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게임은 기술 발전과 함께 더욱 조직화돼 발전해 갔다.
게임은 과거 하위문화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술이 게임을 선도하고 문화가 토양으로 받쳐 주는 과거 상황은 이제 옛말이 된 지 오래됐다. 현재 게임은 기술 선도와 문화 토양 형성의 주요인으로 간주된다.
인식 변화를 이유로 두 가지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 환경이 점차 기술로 진화한다는 점이다.
더 이상 시청자에 의해 전개가 결정되는 TV 속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놀랍지 않다. 더 나아가 시청자 또는 소비자가 콘텐츠 주요 캐릭터를 설정하고 육성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쯤 되면 현재 소비되고 있는 특정 콘텐츠를 '일종의 게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놀이, 쉼에 대한 사회 인식 변화다. 핀란드 탐페레대 연구소 프란스 메이레는 디지털 게임 연구가 부족한 원인으로 대중문화 위계질서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하는 게임의 사회 위상 문제를 언급한다.
'게임이 단순하게 자극과 쾌락에만 집중한다'는 지적은 부인할 수 없다. 게임은 매우 엄격한 상업 전략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다수다. 플레이어를 게임에 몰입시키기 위해 더욱 자극 강한 요소가 활용된다. 이는 게임이 지닌 상호 작용 및 피드백 시스템 등에 기인한다.
그러나 현재 의미 있는 숫자의 대안 게임이 등장하고 있다. 게임에 대한 사회 인식은 서서히 변하고 있다.
모든 기술 미디어 형태에 게임 요소가 가미되며, 게임이 점차 중요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대표 사례다.
처음부터 게임이 예술로 다뤄진 것은 아니다. 미국 영화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 로저 이버트는 2005년에 다소 공격성 강한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비디오 게임은 절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예술은 규칙, 점수, 목적, 결과와 상관없이 경험하는 것인 데 반해 게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픽이 뛰어나고 철학 이야기가 있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 자체가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이버트의 이러한 주장은 다양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경험한 게임은 과거 아케이드 게임에 국한돼 있으며, 단순한 승패가 아닌 과정에서 획득되는 미학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게임이 다수 존재한다는 게 지적 근거였다. 게임이라는 장르에서 특화되는 특성에 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다는 점도 주요한 비판 요소다.
현대 예술이 게임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게임은 기본이 가상 환경이다. 상호 작용하는 특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존 수동형 관객은 직접 참여해서 '운동 감각'으로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경험할 수 있다. 현대 예술이 강조하는 몰입, 체험, 참여 등 요소는 게임을 통해 충실히 구현될 수 있다.
2018년 현재 다수 미디어아티스트들이 게임 엔진을 이용해 자신만 위하는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상호 작용 속성을 통해 더욱 몰입하는 환경 제공을 시도한다.
다만 게임과 예술은 궁극 목적에서 여전히 차이를 보인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 속에서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한다면 (게임) 예술은 오히려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상현실(VR)로부터 우리가 마주하는 실제 세계를 사유하게 만든다. 게임은 이제 우리의 문화 사회, 예술 환경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유원준 디렉터 yoo896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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