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쇼핑몰에서 저는 영화를 보고, 아내는 쇼핑을 하느라 잠시 헤어졌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아무리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거예요. 분명 신호는 가는데.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 휴대폰을 빌려 전화를 하더군요. 부부싸움 할 뻔 했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발생한 통신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는 지인의 경험담이다. 편리함을 자랑하는 통신이지만 한 번 사고가 나면 예기치 않은 피해를 초래한다. 그런 일이 흔하지 않아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이민화 카이스트 교수는 2012년 출판한 '호모 모빌리언스'에서 통신 발달에 힘입어 제3의 인류 진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설파했다.
그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네트워크'의 역사이며 실크로드(육상), 대항해(해상), 인터넷(통신) 순으로 진행해왔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혁명을 앞뒀는데, 이게 바로 '모바일 네트워크 혁명'이다. 네트워크로서 이동통신, 이를 구현하는 휴대폰, 사물인터넷(IoT) 등 모바일 기기 발달로 호모 모빌리언스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통신이 인류에 미친 영향만큼은 막대해 보인다. 스마트폰을 장착한 인류는 '초인류'로 진화했고, 유무선 네트워크는 사람과 사물을 빈틈없이 촘촘히 그물망으로 엮었다.
문제는 그물코가 나갔을 때 드러난다. 우리는 그물코가 나가지 않도록 네트워크를 두 겹 세 겹 보호하려하지만 어딘가 구멍은 나게 마련이다. 특히 '안전=비용'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네트워크의 마법은 사라지고 초인류는 '초라한 인류'로 추락한다.
일본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는 이런 상황을 다룬다. 어느 날 도쿄 한복판에서 전기 공급이 끊기며 한순간에 모든 전자기기가 작동을 멈춘다. 통신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전화, 카드, 현금인출이 먹통이다.
상황을 벗어나려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헌책방에서 지도를 사 자전거와 손수레를 끌고 도시를 빠져나가려 시도한다. 물물 교환 장터가 열린다. 스마트폰 지도와 내비게이션 앱, 전자상거래와 전자결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종이 지도를 볼 수나 있으려나?
세상은 갑자기 아날로그 원시 상태로 돌변하고, 디지털 인류는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한다.
서울에서 통신 먹통 사태가 터졌을 때 평소 무시하고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에 관심이 쏠린 건 우연이 아니다. 공중전화나 현금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초연결, 초지능 사회를 꿈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일수록 그것이 끊겼을 때 생길 부작용에 두 번, 세 번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김용주 통신방송 전문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