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호 산부인과 전문병원 제일병원은 전국 신생아 2%를 분만했을 정도로 찬란한 역사를 자랑했다. 2000년대만 해도 전국 분만 1위를 고수하던 병원이 개원 55년 만에 폐업 위기에 놓였다.
제일병원은 경영 부실과 함께 저출산 위기까지 합쳐져 폐업 위기에 내몰렸다. 제일병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분만 산부인과도 설자리가 없다. 합계 출산율이 사상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신생아, 환자 부족이 심화된다. 가뜩이나 저수가 체계에서 산부인과 생존이 위협받는다. 돈 안 되는 분만실을 없애고 산전·후 검사나 산후조리원 등 수익창출에 집중하는 추세가 확산된다. 지방에서는 분만시설을 찾지 못해 대도시 '원정 출산'을 오는 사례까지 나온다. 저출산·저수가 악재 속에서 대한민국 병원 산업은 물론 산모와 아기 건강권도 위협받는다.
◇아기 울음 끊긴 대한민국, 저출산 늪으로
2017년 기준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1.052명이다. 합계 출산율이란 여성이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뜻한다. 2012년 1.297명으로 조금씩 늘어났지만, 작년 3분기 기준으로 0.95명까지 떨어졌다. 2018년 전체 합산해도 1.0명 이하가 유력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합계 출산율(1.68명)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출생아 수도 31개월 연속 최소기록을 경신하며 심각한 저출산 흐름을 이어간다. 통계청 인구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출생아 수는 2만6500명으로, 전년대비 1400명 줄었다. 1981년 월별 출생아 통계를 작성한 이후 최저 수준이다.
연간 출생아 수는 2017년 기준 35만7800명을 기록했다. 이 역시 1981년 이후 처음으로 40만명 이하로 떨어졌다. 1971년 102만명의 출생아 수를 기록한 것과 비교해 약 50년 만에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저출산 위기, 산부인과도 '울상'
국내 1호 여성전문병원 제일병원은 현재 외래·입원을 전면 중단하며 폐원 기로에 섰다. 무리한 투자, 노사갈등 등 내부 원인도 작용했다. 외부적으로 저출산 흐름도 간과할 수 없다.
1963년 개원한 이 병원은 한 해 분만 건수가 1만건에 달할 정도로 우리나라 최고 분만병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최근 분만 건수는 4000건에 불과할 정도로 실적이 저조했다. 대형 산부인과병원조차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의원급은 당장 직원 월급주기도 어렵다.
한 지방 산부인과병원 원장은 “국내 최고 여성전문병원, 수도권 대형 산부인과병원조차 내일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지방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면서 “단순히 분만만 해서는 돈을 벌기 어려워 난임, 불임 등 전문 클리닉으로 전환하려고 해도 환자가 수도권으로 몰려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실제 의원급 산부인과 수는 해마다 감소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지역 의원급 산부인과 수는 1366개였지만 매년 감소해 지난해에는 1319개에 이르렀다. 상당수는 분만실이 없는 산부인과다.
산부인과 인기가 시들면서 인력 확보도 쉽지 않다. 피부과, 성형외과, 가정의학과 등 인기 높은 진료과에 의대생이 몰리면서 수년 째 산부인과 의사 배출이 제자리걸음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산부인과 전문의 수는 5663명이다. 2014년부터 4년간 연평균 1.2% 늘었다. 내과(4.3%), 정형외과(3.7%), 피부과(3.8%), 성형외과(6.2%) 등 주요 진료과와 비교해 가장 낮다.
수도권 종합병원 관계자는 “수련병원으로 지정받으면 부족한 산부인과 전공의를 배정받아 도움이 되는데, 분만실이나 감염시설 등 설비 투자가 의무 조건”이라면서 “1년에 10건 남짓 분만하면서 투자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산부인과 인력은 확보하기 힘들어 이중고에 있다”고 말했다.
◇맹장수술보다 싼 산부인과 분만
우리나라 산부인과 경영이 어려운 것은 저출산 흐름이 주요 배경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낮은 수가체계가 원인이다. 낮은 수가 체계에서 출생아마저 줄면서 산부인과 병·의원이 버틸 힘이 없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병원에서 자연 분만하면 건강보험 진료수가는 최저 20만3000원 정도다. 맹장수술이 27만4000원가량인 것을 감안하면 턱 없이 낮다는 게 의사회 주장이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법제이사는 “2000년 1570개였던 전국 분만병원은 2011년 808개로 약 50%가 감소했다”면서 “일본이 10년간 25%가 줄었던 것과 비교해 우리나라는 두 배 이상 빠른데,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인 의료 수가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산부인과 병원이 인프라 투자가 높은 영역이라는 특수성도 저출산 시대 부담으로 작용한다. 분만실은 기본적으로 365일 24시간 운영돼야 한다. 응급수술할 시설과 장비, 인력도 갖춰야 한다. 신생아, 산모 감염과 영양학 지원을 위해 시설, 의약품 구매 비용도 비싸다. 초기 도입 비용은 물론 유지보수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이를 보존할 수가도 낮아 수익 창출이 어려운 구조다.
결국 산부인과병원도 분만을 포기한다. 갈수록 출생아 수가 줄어드는데다 분만을 해도 시설 유지비조차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산전·검사와 산후조리원 등 다른 수익모델에 집중한다.
김완배 대한병원협회 국장은 “산부인과병원은 환자 수요 지속 감소, 저수가 체계에서 분만·진료보다는 검사, 산후조리원 등으로 수익을 보전한다”면서 “수익구조가 미흡하고 출산 연령이 높아지면서 분만 리스크가 커져 분만을 포기하는 곳이 속출한다”고 우려했다.
◇분만실 없는 산부인과, 갈 곳 없는 산모
분만실이 없는 산부인과는 산모와 아이에게 큰 재앙이다. 지역에 따라 산부인과 분만실이 5년 전과 비교해 최대 80%가 사라졌다는 주장도 나온다. 출산이나 응급상황 발생 시 환자가 이용할 의료기관이 없다. 산부인과 의료 취약지가 전국으로 확산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대형 분만병원 중심 구조가 고착화됐다. 대형병원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서비스와 연구 역량이 발전한 긍정적인 면도 있다. 저출산·저수가 체제에서 이들이 흔들리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동네 분만 병·의원을 흡수한 대형병원이 흔들리면서 보완할 중소병원이 사라진 것이다.
산부인과는 국가 존립을 상징하는 인구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다른 진료과보다 공공 성격이 짙다. 하지만 분만 취약지역은 갈수록 확산돼 산모와 태아 건강권을 해칠 우려다. 정부도 문제를 인지,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분만 취약지 지원사업을 실시했다. 9개 시·도 분만 취약지역 산부인가에 자연분만 수가 200%를 가산하는 방식이다. 최후의 보루로 분만 시설을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도움은 되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단기 처방식 지원이 아니라 자생할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국장은 “정부는 저출산 해소를 위해 아이를 낳으면 부모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한다고 하지만 정작 아이를 낳을 의료기관 투자는 하지 않는다”면서 “적자에 허덕이는 산부인과가 산후조리원 등 수익사업에만 내몰리게 되면 피해는 산모와 태아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자신문 CIOBIZ] 정용철 의료/바이오 전문기자 jungyc@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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