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과학기술을 하는가? 이 질문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종종 던지기도 듣기도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지나치기에는 무엇인가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과학기술자에게는 과학기술을 하는 것 자체가 삶이고 인생이기 때문이다.
답을 찾기 위해 잠시 과거를 돌이켜보면, 선조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널리 사람에게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 떠오른다.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 이념은 세종대왕 한글 창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보여준다. 훈민정음 서문에 적힌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내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라는 감동적 구절이야말로 과학기술은 사람을 위한 것에서 시작해야 함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지배 및 6·25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우리나라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라 부흥을 위해 과학기술에 매진했다. 당시에는 '나라의 부흥을 위해'라는 목표가 뚜렷했다. 그래서 선발주자 뒤를 따라잡기만 하면 됐다. 지나간 흔적과 발자국이 남아있으니 서둘러 뒤쫓아 가면 됐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더 이상 먼저 간 흔적도 발자국도 없는 지점에 서 있게 되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잰 발소리만 들릴 뿐.
이렇게 막막한 앞길을 트고 가야 하는 이 시점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선조로부터 내려온 홍익인간 이념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나라 부흥이라는 목표에만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시야를 더 넓게 더 멀리해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면 길은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다. 즉, 과학기술적 영토를 넓혀서 생각한다면 영토의 숲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라 적절한 숲길을 개척해 나가면 될 것이다. 우리는 한류 문화 분야에서 이미 이와 유사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K팝 등과 같은 한류 문화가 지구촌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줌으로써 문화적 영토가 빠르게 넓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지구촌은 무엇보다 지구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해 온실가스 배출 없는 안전한 에너지원 개발에 노력을 쏟고 있다. 태양광이나 풍력과 같은 신재생에너지가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핵융합에너지 같은 지속가능한 대용량 에너지 개발이 필요하다. 화석연료 시대에는 에너지 자원을 많이 가진 나라가 에너지 강국이었다. 반면에 태양광이나 풍력은 지구상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핵융합에너지 주 연료인 중수소는 바닷물에서 거의 무한히 얻을 수 있다. 결국, 미래 에너지 시대는 화석연료 시대처럼 '에너지자원' 보유 여부가 아닌 에너지 생산을 위한 '과학기술' 보유 여부에 따라 에너지 강국이 될 수 있다. 즉, 인류 미래 에너지 문제는 에너지자원이 아니라 과학기술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을 통해 인류 에너지 문제 해결하고자 하는 국제공동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과학기술 선진 7개국은 공동으로 핵융합에너지 상용화 연구를 위해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지역에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를 건설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KSTAR라는 세계 최고 성능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를 성공적으로 건설하고 운영하면서 핵융합에너지 개발을 위한 과학기술을 충실히 쌓아 왔다. 그 결과 우리 과학기술자가 ITER 건설 주요책임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핵융합 분야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지평을 넓혀 나가는 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됐다.
문화 및 과학기술 분야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건 인류 행복이라는 큰 그림을 마음에 품고 노력한다면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퍼스트 무버'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더 멀리 더 넓게 보며 선조로부터 귀하게 물려받은 홍익인간의 이념에 따라 사람을 위한 과학기술을 통해 과학기술적 영토의 확장을 함께 꿈꿔 보았으면 한다.
유석재 국가핵융합연구소 소장 sjyoo@nfr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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