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컴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명령·과징금 처분에 불복해 2017년 행정소송(이하 본안소송)을 낸 후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무더기 '소송·재판기록 열람 제한' 소송을 제기했다. 본안소송의 실질적 당사자인 국내외 기업이 퀄컴 관련 정보를 볼 수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그동안 퀄컴이 공정위에 자료접근권을 강력 요구하고, 조사 과정에선 국내외 기업이 공정위에 제출한 증거 자료를 열람하겠다며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정보공개'를 강조하던 모습과 배치된다.
20일 업계와 서울고등법원에 따르면 퀄컴은 공정위 등을 대상으로 지난 2년 동안 총 40건 안팎의 '소송·재판기록 열람 제한' 소송을 제기했다.
공정위는 2016년 말 퀄컴의 시장지배력 남용을 적발, 역대 최대 과징금(1조300억원)을 부과하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퀄컴은 이듬해 2월 과징금·시정명령이 부당하다며 본안소송을 제기했으며, 이때부터 2년 동안 낸 열람제한 소송만 약 40건이다. 법조계는 무더기 열람제한 소송을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퀄컴은 소송·재판기록에 퀄컴 영업비밀이 포함됐기 때문에 공정위 측 보조참가인(LG전자, 애플, 인텔, 미디어텍, 화웨이) 등이 관련 내용을 볼 수 없도록 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보조참가인은 퀄컴의 불공정 행위로 피해를 본 기업으로, 공정위와 일종의 '연합군'을 구성해 본안소송에 직접 대응하는 실질적 당사자다.
이런 움직임은 그동안 퀄컴이 보여 준 모습과 모순된다.
퀄컴은 2017년 공정위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심의 과정에서 '절차상 보호 조치'를 받지 못했다며 자료접근권과 교차심문권 보장을 주장했다. 자료접근권은 법 위반 혐의 입증 관련 증거 자료를 피심인(퀄컴)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 퀄컴은 공정위 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2016년 초 공정위가 애플 등으로부터 받은 증거 자료를 열람하게 해 달라고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번 사안에 밝은 업계 관계자는 “퀄컴은 다른 기업이 제출한 자료는 다 봐야겠다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관련된 자료는 영업비밀이라고 공개할 수 없다는 식”이라면서 “같은 이유로 퀄컴은 이번 소송과 관련된 특허 내용을 보조참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등 상당히 폐쇄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지적했다.
이런 행태가 한·미 정부 간 협의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최근 우리 정부에 미국 기업의 불공정거래 혐의를 조사할 때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르는 양자 협의를 요청했다. USTR 역시 퀄컴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자료접근권·교차심문권 도입을 요구해 온 만큼 협의에서 관련 주장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USTR가 양자 협의를 요청하면서 특정 기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퀄컴 사건을 염두에 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공정위는 양자 협의가 성사되면 충실히 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공정위 관계자는 “양자 협의가 이뤄진다면 USTR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해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