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직장인의 꿈이다. 과학자 역시 같은 꿈을 꾼다. 종일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어슴푸레 해가 지고, 연구실을 나와서도 머릿속은 새로운 이론과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하다. 일과 개인의 삶을 의도해서 구분 짓지 않으면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회사에 남아 있는 아이러니에 빠지기 일쑤다.
취미로 시작한 제과제빵은 일과 삶의 구분선이 됐다. 힘차게 머랭을 치면 온갖 잡념이 사라지고, 오븐 안에서 익어 가는 향긋한 쿠키 냄새에 입가로는 옅은 미소가 번져 나간다. 직접 만든 빵을 지인과 나눌 때면 갓 구워진 빵의 온도만큼이나 내 마음도 따스하게 덥혀진다.
빵을 만들면서 알게 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빵과 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전공인 복합소재와 빵의 제조 과정은 '도플갱어'처럼 서로를 쏙 빼닮은 모양새다.
복합소재는 말 그대로 두 가지 이상 소재를 결합, 원래 소재보다 성능이 우수한 소재다. 자동차, 항공기, 건축, 생활용품까지 산업과 일상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실험실에서는 탄소섬유, 필러, 고분자 같은 복합소재 기초 재료를 오토클레이브나 핫프레스 같은 기기를 통해 새로운 물질로 탄생시킨다.
이는 제빵사가 밀가루·설탕·버터 등 기본 재료를 섞어서 오븐에 담고, 다양한 모습의 빵이나 케이크로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다시 말해서 버터와 계란 양에 따라 딱딱한 바게트나 부드러운 식빵이 되는 것처럼 기초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섞는지, 어느 정도의 열과 압력을 가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의 복합소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꾸준히 사랑받는 카스텔라, 디저트로 각광받는 칸레(카눌레)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제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다. 열전달이 낮은 나무틀을 사용하는 카스텔라는 평평하고 반듯한 모양으로 만들어진다. 이와 달리 구리틀을 사용하는 칸레는 겉과 속 온도차로 말미암아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러운 질감을 띠게 된다.
제과제빵에 몰두할수록 일과 삶의 '구분선'이 아니라 '연장선'이 된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빵'이 나의 연구 활동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학자에게 매우 어려운 요청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연구 분야와 기술을 누구나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인데 빵 덕분에 이러한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또 빵을 통해 소재 연구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고, 틀에 갇힌 사고의 경계를 허무는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최고 발명가이자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몇 년 전 그가 제작한 요리노트 내용이 담긴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요리에 대한 그의 열정과 흥미는 기계 발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는 과학자의 다양한 취미가 과학기술 발전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대한민국 과학자가 취미를 통해 본인의 연구 분야에 신선한 자극을 받기를 바란다. 긴 기다림과 지혜, 지식, 정성이 응축된 장인의 빵처럼 가치 있고 널리 사랑받는 복합소재의 발전을 위해 나는 오늘도 실험실로 향한다.
김민국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구조용복합소재연구센터 선임연구원 minkook@kist.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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