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과학계 핫이슈는 단연 '블랙홀 관측'이다. 시간의 범위를 지난 수십 년으로 넓혀도 달 착륙을 제외하면 이만한 업적은 아주 드물다. 100여년간 이론으로만 존재했고 영화나 과학잡지에서 상상의 그래픽으로만 보았던 블랙홀을 실제 보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도 블랙홀이 인류 상상력을 자극한 건 바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 아닐까.
5500만광년 까마득한 거리를 관측하도록 도운 건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이다. 외래어가 자주 그렇듯 불친절한 번역은 오히려 이해를 방해한다. '사건의 지평선'이 그런 경우다. 이는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을 우리말로 번역한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블랙홀이고, 보면 사건(Event)이 일어나는 주변 경계선(Horizon)을 관측하는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건 이벤트 호라이즌이라는 말이 과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쓰던 용어고, 20여년전 블랙홀을 다룬 동명의 영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1997년 미국에서 개봉한 이벤트 호라이즌은 SF, 스릴러, 공포 요소를 두루 갖춘 선구적 작품이다.
서기 2040년,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우주를 탐사하던 이벤트 호라이즌호가 실종되고 7년 후 이를 찾기 위한 구조선을 파견한다.
마침내 이벤트 호라이즌호를 찾아내지만 대원은 모두 죽어 있다. 구조선 '루이스 앤 클락'호에서도 구조 활동을 하던 대원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살아남은 대원도 이상한 환영에 시달리며 공포가 서서히 목을 조여온다.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마침내 블랙홀이 등장한다. 이벤트 호라이즌호가 블랙홀을 통해 '차원의 문'을 통과하는 능력을 지녔고, 이 문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무엇인가 본 대원이 모두 죽는 것이다. 대원이 본 것이 무엇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영화를 직접 보면 속 시원하게 알 수 있지만 무섭거나 잔혹한 장면을 싫어한다면 시청을 삼가는 게 좋다.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듯하다. 무려 20여년전 이런 수작이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도 많다. 우주선과 각종 그래픽, 블랙홀 소재, 공포와 스릴러의 혼합 등에 높은 점수를 준다. 반면에 끝까지 궁금증만 자아내다 불필요하게 잔인하게 끝난다는 평도 있다.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이 블랙홀 관측에 성공했지만 사실 우리는 정확한 모습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본 것은 블랙홀의 겉모습일 뿐이며, 그마저도 약간의 '각색'을 했다. 이 망원경은 전파망원경 8대를 연결해 거대한 '가상 망원경'을 구성, 블랙홀에서 오는 전파를 수신해 그 모습을 재구성한 것이다. 실제 눈으로 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더욱이 블랙홀의 '검은 속'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과학이 발달해도 볼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면 우주 한 구석에 언제까지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가 남는 셈이고, 그것이 우리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할 것 같다. 상상력은 예나 지금이나 과학의 친구다.
김용주 통신방송 전문기자 kyj@etnews.com